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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300229
한자 仁同縣
영어의미역 Locality Administrative District
이칭/별칭 수동(壽同),옥산(玉山)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지역 경상북도 칠곡군
시대 고려/고려,조선/조선
집필자 임삼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정 시기/일시 940년 - 수동현에서 인동현으로 개칭
개정 시기/일시 1604년 - 인동현에서 인동 도호부로 승격
관할 지역 칠곡군 석적읍
관할 지역 칠곡군 가산면
관할 지역 칠곡군 북삼읍
관할 지역 칠곡군 기산면
관할 지역 구미시 인동동
성격 고지명

[정의]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 칠곡 지역에 설치되었던 지방 행정 제도.

[개설]

인동현(仁同縣)은 940년(고려 태조 23) 주군현 개편 때 수동현(壽同縣)인동현으로 명칭을 변경하면서 생겨났다. 고려 시대에는 인동현, 조선 시대에는 인동현 또는 인동 도호부로 불렸다. 1895년 지방 행정 구역 개편 때 인동군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가, 1978년 선산군, 칠곡군, 인동군, 구미읍을 합쳐 구미시로 편제되었다.

[관련 기록]

인동현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성산군의 속현으로 수동현이라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高麗史)』 권 57 지 제11 지리 2 상주목 경산부에서는 “경산부(京山府)는 …… 충선왕 2년에 전국의 목이 없어짐에 따라 낮추어서 경산부로 하였다. 이 부에 가야산(伽倻山)이 있고 이 부에 소속된 군이 1개, 현이 14개 있다. …… 인동현은 현종 9년에 본부에 소속되었다. 공양왕 2년에 감무를 두어 약목현(若木縣)을 여기에 소속시켰다”라고 되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경상도 안동 대도호부 인동현에서는 “김부식의 『신라 지리지(新羅地理誌)』에는 ‘성산군(星山郡)의 영현(領縣)이 넷인데, 수동현(壽同縣)은 본디 사동화현(斯同火縣)이다.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은 자세히 알 수 없다.’고 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27권 경상도 인동현에서는 “동쪽으로 성주(星州) 경계까지 43리, 남쪽으로 같은 주계(州界)까지 57리, 서쪽으로 개령현(開寧縣) 경계까지 33리, 북쪽으로 선산부(善山府) 경계까지 15리다. 서울과의 거리는 577리이다.”라고 되어 있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별집 제16권 지리전고(地理典攷) 주(州)와 군(郡)에서는 “신라 때의 사동화현인데, 인동으로 고쳤다. 선조 갑진년에 부로 올렸다. 9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리이다. 수동(壽同)·옥산(玉山)이라고도 한다. 약목현은 속현이고, 신라 때의 대목현(大木縣)이니, 칠촌(七村) 또는 곤산(昆山)이라고도 한다. 계자현(谿子縣)이라고 고쳤다. 소목현(小木縣)이 있다. 견훤이 벽진(碧珍)을 침공할 때, 대목·소목 두 고을의 곡식을 베어 버렸다고 하였는데 지금 어디인지 상세하지 않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서는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라고 되어 있으며,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는 “선조(宣祖) 37년에 도호부(都護府) 겸 조방장(助防將)으로 올렸다 41년에 조방장을 없앴다.”라고 되어 있고, 『여지도서(輿地圖書)』 경상도 인동 건치 연혁에도 관련 기록이 나온다. 『칠곡지(漆谷誌)』에는 칠곡군과 인동군이 통합되어 칠곡군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변천]

인동(仁同)은 757년(경덕왕 16) 이전에는 사동화현 또는 이동화혜(爾同火兮)라고 불렸는데, 757년 수동현(壽同縣)[별호는 옥산(玉山)]으로 바꾸고 성산군(星山郡)[지금의 성주군]에 소속되었다. 940년 주·군·현 개편 때 인동현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1018년(현종 9) 경산부(京山府)[지금의 성주군]의 속현이 되어 오랫동안 지방관이 파견되지 못한 채 경산부의 간접 지배하에 있었다. 1390년(공양왕 2)에 다시 경산부에서 분리 독립되면서 감무가 파견되고 약목현을 영속시켰다. 1413년(태종 13) 전국의 감무를 혁파할 때 인동현으로 개칭하면서 현감이 파견되었다.

1601년(선조 34) 찰리사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가 천생산성을 보수하여 관방의 요새로 부각됨에 따라, 1604년(선조 37) 도원수 한준겸(韓浚謙)에 의해 도호부로 승격되면서 조방장(助防將)을 설치하고 부사(府使)가 겸임하였다. 1895년(고종 32) 전국이 23부제로 개편되자 인동 도호부는 그 속현인 약목현과 통합하여 인동군으로 되어 대구부에 소속되었다. 인동군은 읍내면·북면·동면·장곡면·문량면·석적면·북삼면·약목면·기산면 등 9개 면을 관할하였다. 1896년 지방 행정 체제를 다시 개정하여 13도 7부제가 실시되자 인동군은 경상북도에 소속되었다. 1911년 인동군청을 약목면으로 옮겼다.

1914년 3월 1일 일제의 행정 구역 통폐합 때 인동군을 폐지하여 칠곡군에 편입시키고, 같은 해 4월 1일 읍내면과 북면을 합쳐 인동면(仁同面)으로 개편하였다. 인동군 동면 지역은 칠곡군 가산면으로, 인동면 장곡면과 문량면은 칠곡군 석적면으로 편입되었다. 1978년 2월 15일에 선산군 구미읍과 칠곡군 인동면을 합쳐 구미시가 탄생하였다. 1983년 2월 15일에 인동(仁同)의 인의동(仁義洞), 황상동(黃桑洞), 구평동(九坪洞)을 합쳐서 인동동(仁同洞)이 되었다.

조선 시대 인동현의 규모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인동현의 호수는 320호, 인구가 1,086명이었다.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39명, 진군(鎭軍)이 85명, 선군(船軍)이 254명이다. 토성(土姓)은 장(張)·유(兪)·유(劉)·심(沈)·고(高)이다. 둘레가 324보이고 험준한 천생산(天生山)에 둘레의 반 정도 석벽(石壁)을 두르고, 석성(石城)을 쌓았다.

인동현약목현에는 역(驛)이 설치되었으며, 봉화도 남쪽의 약목 박집산(朴執山)과 북쪽의 해평(海平) 반이산(反伊山) 두 곳에 설치되었다. 기름진 땅과 메마른 땅이 반반이었고, 개간한 토지는 3,345결이었다. 주로 벼·조·보리·콩·뽕나무·삼[麻]을 재배하였고, 토공(土貢)은 호두·왕대·여우 가죽·노루 가죽 등이었다. 토산품(土産品)은 은구어·잉어[鯉魚]·홍시(紅柿)·은석(銀石)이다. 그 밖에 자기소(磁器所), 도기소(陶器所)가 각각 한 곳씩 존재하였다.

[현황]

인동현은 지금의 칠곡군 석적읍·가산면[다부리·학산리·학상리·학하리·심곡리·송학리·천평리북삼읍·기산면 및 구미시 인동동 지역이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3.08.07 [형성 및 변천] <변경 전> 선산군(善山郡), 구미읍(龜尾邑), 칠곡군(漆谷郡), 인동면(仁 同面)을 합쳐 <변경 후> 선산군(善山郡) 구미읍(龜尾邑)과 칠곡군(漆谷郡) 인동면(仁 同面)을 합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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