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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300405
한자 烽燧
영어의미역 Beacon Fire Station | Signal-Fire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칠곡군
시대 고대/삼국 시대/신라,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고려/고려,조선/조선
집필자 이희돈

[정의]

경상북도 칠곡 지역에 분포하는 불과 연기를 이용한 통신 시설.

[개설]

봉수란 횃불과 연기로 변방의 긴급한 군사정보를 중앙에 알리는 군사 통신 제도 가운데 하나이다. 봉수는 봉(烽)과 수(燧)로 구성되어 있으며, 봉은 야간에 횃불을 통해서 의사를 전달하며, 수는 낮에 연기를 올려 통신하는 형태이다. 봉수의 어원은 ‘봉(烽)’인데 흔히 ‘봉화’라 하며, 이리 똥을 태워 연기를 낸다고 하여 낭화(狼火)·낭연(狼煙)이라고도 한다. 봉수는 수십 리의 거리를 두고 서로 살피기 좋은 요지의 산 정상에서 밤에는 횃불을 들고 낮에는 연기를 피워서 전달하는 것으로, 국방상의 중요한 임무를 발휘하여 위급한 일을 빨리 알리는 경비 전신 역할을 맡아하던 중요한 시설이었다. 현재 칠곡에 남아있는 봉수지는 약목면 무림리에 있는 박집산 봉수대기산면 각산리에 위치한 각산리 봉수대가 있는데 두 곳 모두 그 형태는 남아있지 않다.

[봉수제의 기원과 변천]

봉수제처럼 서로 바라볼 수 있는 거리의 높은 산정에서 횃불이나 연기로 신호를 보내어 의사를 표현하는 방법은 이미 오래 전부터 전 세계적으로 이용되어 왔다. 우리나라에서 봉수제와 관련하여 가장 오래된 기록은 가락국 수로왕 전설에서 찾을 수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가락국기에는 수로왕허황후를 맞이할 때 유천간(留天干)을 시켜 망산도 앞바다에 나가 붉은 빛의 돛을 달고 붉은 깃발을 휘날리는 배가 나타나면 횃불(봉화)로써 안내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 삼국시대의 지명 가운데 봉현·봉산성·봉산 등의 명칭이 보이고 있는 것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고양군 고적조에 6세기 초 고구려 안장왕 때에 봉화를 올렸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 초기에 일정 노선의 봉수제가 이미 실시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군사통신 수단으로서의 봉수제가 기록상으로 처음 나타나는 때는 1149년(의종 3) 이후로서 8월에 서북병마사 조진약(曺晋若)의 상주를 받아들여 봉수식을 정하면서 비로소 봉수제의 제도적 규정이 마련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변고가 없는 평상시 낮에는 연기를, 밤에는 횃불을 각 1번, 보통 위급한 정도인 2급 시에는 각 2번, 정세 긴급의 3급 시에는 각 3번, 초긴급 상황인 도급 시에는 각 4번씩 올리도록 하고, 각 봉수소에 방정 2인과 백정 28인으로 모두 30인을 배치하되 전례대로 평전 1결씩을 지급키로 한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제도는 고려시대의 여러 제도를 계승하여 개혁과 발전을 거듭하며 확립되어 갔다. 그 뒤 봉수제는 세종 대에 이르러 고려시대 규제를 바탕으로 하고, 『당률(唐律)』과 『대명률(大明律)』 등 중국의 제도를 참고로 하여 거화거수(擧火炬數) 등 관계 규식을 새로 정비 및 강화되었다. 『세종실록(世宗實錄)』에 의하면, 1419년(세종 1)에 위험도에 따라 5거에 이르는 ‘거화법’과 관계 요원의 근무 부실에 대한 처벌 규정 등을 정하였고 특히, 1422년(세종 4) 8월에 경상도 수군도안무처치사의 상계를 받아들여 각도의 봉수처에 연대를 높이 쌓고, 그 위에 화기 등의 병기를 비치하여 주야로 간망하도록 규정하였다.

봉수제는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왜적의 침입이 빈번하던 시기에 국가 군사 통신망으로서의 기능을 거의 발휘하지 못하게 되자, 선조 말년 경부터 파발제가 대안으로 등장하면서 치폐의 논란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인조 때부터 복구론이 대두되면서 숙종 이후에 파발제와 더불어 군사 통신시설로서 유지되었으며 17세기말에는 「해동팔도봉화산악지도(海東八道烽火山岳地圖)」가 제작되기도 하였다. 이후 1894년(고종 31)에 근대적 통신법인 전신 전화가 도입되면서 완전히 폐지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봉수대의 종류와 시설]

봉수대는 설치된 지역에 따라 경봉수(京烽燧)·연변봉수(沿邊烽燧)·내지봉수(內地烽燧) 등 3종류로 나눌 수 있다. ‘경봉수’는 전국의 모든 봉수가 집결하는 중앙 봉수로서 서울 목멱산[남산]에 위치하며 목멱산봉수 또는 남산봉수라 불렀다. ‘연변봉수’는 연해봉수(沿海烽燧) 또는 권설봉수(權設烽燧)라고도 하는데 동서남북 국경의 제일선에 위치하는 봉수이다. 특히 경봉수와 내지봉수에 비해 임무 수행이 어렵고 위험하여 근무자를 보호하기 위해 연대를 설치하였는데, 봉수 구조상 내지봉수와 구분하는 큰 특징이 된다. ‘내지봉수’는 복리봉수(腹裏烽燧)라고도 하며, 경봉수와 연변봉수를 연결하는 봉수로 수적으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칠곡의 봉수]

칠곡에는 2개의 봉수가 있었다고 전하는데 그 첫 번째는 각산리(角山里) 봉수대(烽燧臺)기산면 봉산리와 성주군 월항면 용각리의 경계 지점에 있는 봉화산[468.3m]의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다. 박집산 봉수대로부터 남쪽으로 10리 정도의 거리를 두고 위치하고 있다. 봉수대 유적은 장방형의 편평한 대지를 이루고 있으며, 하부에는 장대석을 축조한 흔적이 남아 있다. 축대나 다른 유구의 흔적은 현재 확인할 수 없다. 각산 봉수대는 남으로 달성군 하빈에 연결되고 동북쪽으로 박집산 봉수대로 연결된다.

두 번째는 박집산(朴執山) 봉수대(烽燧臺)약목면 무림리 박집산[347.7m]의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봉수대의 터는 장방형에 가까운 타원형인데, 형식은 석심 토축을 기반으로 상부에는 토축 만으로 혼합된 석축으로 형성되어 있다. 석축의 전체적인 범위는 남북 길이 30m, 동서 길이 15m 정도이다. 석축의 규모 높이 1m, 폭은 하부가 2m이고, 상부는 1m 정도이다. 『안동부읍지』에 의하면 박집산 봉수대는 인동읍에서 서쪽으로 낙동강을 건너 남쪽 30리 지점에 위치하며, 봉수대에서 남쪽으로 10리 떨어진 성주 각산리 봉수대의 신호를 받아 30리 북쪽에 있는 건대산 봉수대로 보냈다고 한다. 봉수터에는 아직도 돌담장과 기왓장·파편들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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