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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300736
한자 劉秉憲
영어음역 Yu Byeongheon
이칭/별칭 병욱(秉旭),주현(周顯),만송(晩松)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칠곡군 북삼읍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김윤오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항일 운동가
출신지 경상북도 칠곡군 북삼읍 숭오동 220[현 숭오리]지도보기
성별
생년 1842년 12월 30일[음 11월 29일]연표보기
몰년 1918년 8월 26일[음 7월 20일]연표보기
본관 강릉

[정의]

조선 말기 및 일제강점기 칠곡 출신의 항일 운동가.

[개설]

1842년(헌종 8) 11월 29일에 칠곡군 북삼면 숭오동[上江, 江津]에서 유익원(劉翼源)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05년의 을사조약 강제 체결에 대해 반대 상소를 올리고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 때는 ‘5적 성토문’을 붙였다. 일본에 내는 납세를 거부하였고, 일정(日政)의 시책은 일절 불응하여 3차에 걸친 투옥 끝에 옥중에서 단식·순국하였다.

[활동사항]

1905년의 을사보호 조약 때에는 체결 반대 상소를 올려 여론을 환기시켰으며 1910년 8월에 강제 병탄이 되자, 일제의 불의와 친일 분자들을 규탄하였다. 1911년에는 한일합방에 반대하는 불온한 언론을 유포한 이유로 체포되어, 같은 해 12월 25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월형을 받았다. 출옥 후에도 일정에 단호히 불복하여, 세금을 내지 말고 은사금도 결코 받지 말 것을 역설하였다. 1912년에는 토지조사법에 의한 측량도 거부하여 10월 12일에 토지조사국에서 논과 밭에 측량 푯말을 꽂아둔 것을 이튿날 다 뽑아버리어 같은 해 12월 1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금고 5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18년 2월에는 면허 없이 술 4되를 담그고, 3월에는 약목 헌병파견소와 칠곡군청에 일제 멸망을 예언하는 시구(詩句)를 보내어 또다시 체포되었다. 같은 해 3월 2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및 주세령 위반으로 징역 1년 및 벌금 20원에 처하였으나 불복하여 공소하였다. 4월 1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을 부분 취소하여 금고 6월로 감형되었으나, 결코 굴하지 않고 옥중 단식한 끝에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1977년에 건국포장,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1963년 4월 북삼면 숭오동 옛 집터에 ‘숭의재(崇義齋)’를 세우고, 매년 봄 유림들이 상의계회(尙義契會)를 갖고 있다. 1963년 8월에 ‘만송유선생순국기념비(晩松劉先生殉國紀念碑)’를 칠곡군 약목면 복성리 선암봉(扇巖峰) 아래에 세우고, 매년 광복절 추모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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