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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사건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300822
한자 朝鮮銀行大邱支店爆彈事件
영어의미역 Joseon Bank Daegu Branch Bomb Event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칠곡군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폭탄테러사건
발생(시작)연도/일시 1927년 10월 18일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929년 2월 14일
발생(시작)장소 조선은행 대구지점
관련인물/단체 장진홍(張鎭弘)|이정기(李定基)|이원록(李源祿)|이원기(李源祈)|이원유(李源裕)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칠곡군 출신 장진홍(張鎭弘)이 일제에 저항하여 일으킨 폭탄 테러 사건.

[개설]

장진홍은 1895년 칠곡군 인동면 옥계동에서 태어났으며, 일찍이 조선보병대에 들어가 2년 간 복무하고 상등병으로 제대하였다. 제대 후 1916년 서울로 거처를 옮겼으며, 1918년 4월 광복단에 가입하고, 러시아의 하바로프스크에서 한국인 청년들을 대상으로 군사훈련을 시켰다. 그러다가 1925년 10월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폭탄 제조법을 익히고 돌아온 경상북도 성주 출신의 이정기(李定基)가 이원록(李源祿)·이원기(李源祈)·이원유(李源裕) 등과 함께 비밀결사에 가담하면서 1927년 10월 18일에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폭탄을 만들어 던져 건물과 도로를 파손시켰다.

[발단]

장진홍은 1927년 4월 무렵 경상북도 경산에서 일본인 호리키리[堀切茂三郞]에게 폭탄 제조법을 익히고, 같은 해 8월 칠곡과 선산의 경계 지역인 휘안고개에서 폭발 실험을 하였다. 폭파 대상은 도청, 도경, 조선은행과 식산은행 대구지점, 법원, 형무소, 동척 대구지점, 대구경찰서, 친일부호가 등 9개소로 정했다. 같은 해 10월에 폭탄 5개를 만들어 조선은행 대구지점 등을 폭파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경과]

1927년 10월 18일에 조선은행 대구지점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덕흥여관(德興旅館)에 투숙한 뒤 4개의 폭탄에 점화하여 상자에 하나씩 넣고 신문지로 포장을 마쳤다. 조선은행 대구지점, 경상북도청, 경상북도 경찰부 등을 폭파할 계획이었다. 장진홍은 배달원 박노선(朴魯宣)에게 대상 기관에 폭탄을 전달할 것을 시켰고, 박노선은 계획대로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들러 은행 접수구에 지점장에게 전해 달라고 하면서 폭탄을 전달하였다. 그러나 화약 냄새에 민감해 하던 일본인 서무 주임에 들켜 지점장에게 전달되진 않았지만 네 개의 폭발물이 연이어 터져 은행 건물과 도로 등이 파손되었다.

[결과]

장진홍은 사건 직후 대구를 빠져나가 영천의 집으로 돌아가서 제2의 폭탄 투척 계획을 세우다가 일제의 경계망을 피해 1928년 12월 동생이 안경점을 열고 있던 일본 오사카[大阪]로 거처를 옮겼다. 장진홍은 일본에서도 주요 시설을 폭파할 계획으로 대상을 파악하고, 거사 후 러시아로 피신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던 중 1929년 2월 14일에 동생 집에서 한국에서 건너온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대구로 압송되었다. 1930년 2월에 대구지방법원에서 사형 선고, 같은 해 4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사형 선고, 7월에 고등법원 상고 기각으로 사형이 확정되었다. 장진홍은 사형이 선고되던 재판에서 재판장을 향해 기물을 던지고, ‘독립 만세!’를 불렀다. 사형이 집행이 되기 하루 전인 1930년 7월 31일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 순국하였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1.10.27 내용 수정 조선은행 대구지점, 경상북도청, 경상북도 경찰부, 조선은행 대구지점 등을 폭파할 계획이었다 ->조선은행 대구지점, 경상북도청, 경상북도 경찰부 등을 폭파할 계획이었다
이용자 의견
관** 수정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2011.10.27
r******* 경과 2번째 줄에 조선은행 대구지점이 중복됩니다. 2011.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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