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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관 식량 사건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300834
한자 倭館食糧事件
영어의미역 Waegwan Food Event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일수

[정의]

해방 후 미군정 아래에서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주민들이 재고 쌀 배급을 요청하는 시위를 하다가 사상(死傷) 당한 사건.

[역사적 배경]

해방 후 미군정 아래에서 1945년 악화된 기후에 따른 흉년과 1946년 여름 콜레라 발생 등 재해와 미군정의 무원칙한 식량 정책과 식량 강제 매입으로 인해 식량난은 매우 심각한 수준이었다. 특히, 대구·경북 지역의 식량 부족과 이에 따른 기아 문제는 심각하였다. 식량의 강제 수매가 시작된 1946년 2월초에 소두 한 말에 150원 하던 쌀값이 3월초에는 암시장에서 270원으로 치솟았고 대구 시내의 양조장과 두부 공장 앞에는 술지게미와 비지를 사려는 굶주린 시민들이 새벽부터 줄을 서고 있었다. 이러한 식량 부족으로 인한 기아 투쟁이 자주 벌어졌다.

당시 해방과 함께 해외 동포들이 급거 귀국하면서, 대구역 뒤편의 칠성동에는 해방촌이라 불리는 빈민촌이 형성되었는데, 주민 중 80여 명의 부녀자들이 코흘리개들을 들쳐 업고 빈 쌀자루를 들거나 빈 바구니를 머리에 인 초라한 행색을 하고, 대구부청에 몰려가 “배고파 죽겠소!” “배급 쌀 주소!”라고 외쳐댔던 것이다. 또한 당시 경상북도 학무과의 한 조사 자료에 따르면 초등학생들 가운데 평균 50% 이상이 점심을 먹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전학생의 20% 정도는 아침밥을 죽으로 때웠고, 저녁에도 전체 절반 정도의 학생 가정이 밥 대신 죽을 먹어야만 했다. 이에 경상북도 당국은 호남 지방에서 쌀 4천여 가마를 사왔으나, 그것으로는 일반 배급도 부족해 1946년 7월 1일에는 대구에서 식량 요구 시위가 일어날 정도였다.

[발단]

1946년 7월 3일 미군정 당국이 왜관에 있던 식량영단 창고에서 재고 쌀을 대구로 싣고 가려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알게 된 왜관 주민들이 “왜관 주민에게 쌀을 배급하라”면서 군용 트럭 3대를 향해 투석전을 벌였다. 밤이 되자 합세한 주민 1천여 명이 경찰서 정문 앞에서 농성을 벌였다.

[결과]

농성에서 주민 1명이 미군의 유탄에 맞아 사망하고, 주민 10여 명이 붙잡혔다. 경찰청에서는 식량 농성에 대한 원인 규명보다는 체포한 사람 중에 인민위원회 간부가 있다는 점을 들어 좌익의 선동으로 결론지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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