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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300968
한자 朴貴姬
영어음역 Bak Gwihui
이칭/별칭 오계화(吳桂花),향사(香史)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심곡리
시대 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이광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국악인
출신지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성별
생년 1921년연표보기
몰년 1993년 7월 14일연표보기
본관 밀양
대표경력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정의]

칠곡군 가산면 심곡리 출신의 국악인.

[개설]

1921년 2월 6일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심곡1리에서 출생하였으며 본명은 오계화(吳桂花)이며 호(號)는 향사(香史)로 불렸다. 16세되던 1937년에 유성준(劉成俊) 문하에서 『춘향가』, 『수궁가』, 『심청가』, 『흥보가』 등의 판소리를 익히며 가르침을 받았다. 1940년에는 강태홍(姜太弘)에게 가야금을, 1941년에는 오태석(吳太石)에게 가야금 병창을 사사(師事)했다. 창극·민속 무용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창극계에도 활약한 바 있다. 박귀희는 1993년 7월 14일 72세로 서울 종로구 운니동 운당여관 별채에서 별세했다. 향사 박귀희의 장례식은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 장례식으로 치러졌다.

[활동사항]

1943년에 동일창극단을 설립하고 단장을 지냈다. 1955년 한국민속예술학원을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1960년에는 한국국악협회 부이사장을 지냈고, 우리나라 국악꿈나무의 양대 산실이라고 할 수 있는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를 설립하였다. 박귀희는 국악을 전공한 많은 후학들을 배출하였고 그 출신들이 국악계의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다.

1961년에 도쿄[東京]에 무용학원을 설립하여 재일교포에게 한국전통예술을 가르쳤다. 1962년에는 파리의 국제민속예술제에 참가했고 그 후 유럽과 미국, 일본 등지에서 여러 차례 해외 공연에 참가했다. 1968년에 무형문화 제23호 가야금 병창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오늘날 판소리의 구조와 법통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특징이 되는 독자적인 ‘더늠’을 개발하여 음반도 취입했다. 1969년 10월 11일과 12일 서울시민회관에서 박귀희 명인의 ‘국악생활 30년 기념공연’에는 판소리와 창극, 여성 국극의 대스타로 활약한 생애를 마감하는 무대였기에 관중을 온통 매료시켰다.

[저술 및 작품]

1964년에 「한국명창 제일(第一), 제이(第二)집」이라는 박귀희, 김소희의 가야금 병창 음반을 제작했다. 음반 앞면에는 「녹음방초」, 「제비노정기」, 「청석령 지나갈제」, 「사랑가」가 실려 있고, 후면에는 「죽장망혜」, 「자룡이 활 쏘는 대목」, 「호남가」, 「골패타령」, 「백발가」가 실려 있다.

[상훈과 추모]

국악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훈장 동백장과 서울시문화상을 받았다.

[참고문헌]
  • 대한민국역사연구소(http://cafe.naver.com/kjijon.cafe)
  • 국악세상(http://cafe.daum.net/kugakworld)
  • 정하운의 가야금 사랑방(http://cafe.daum.net/haun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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