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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301362
한자 書堂
영어의미역 Village School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칠곡군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김태훈

[정의]

경상북도 칠곡군에 있었던 사설 교육기관.

[개설]

서당에 관한 기록은 사기(史記)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나 삼국시대 고구려에 경당(扃堂)이라는 마을 단위의 학교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것이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 초기부터 각처에서 성행한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의 서당은 그대로 조선시대에 계승되어 더욱 발전된 민중 교육 기관으로 신교육이 실시될 때까지 존속해온 가장 보편화된 교육기관이었다. 서당은 완전히 사적(私的)으로 설립되었기 때문에 반드시 기본 자산이나 인가를 요하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만들거나 없애는 것이 자유로웠으며 뜻있는 인사는 누구나 설치할 수 있었다.

서당이라 불리는 사숙이 성립되는 데는 사족(士族) 자제들을 자기 집에서 가르치는 경우, 가세가 풍족한 집안에서 독선생(獨先生)을 앉혀놓고 약간 명의 이웃 자제들을 무료로 동석시켜 수업하는 경우, 훈장(訓長) 자신이 교육 취미나 소일(消日)을 위하여, 또는 이웃이나 친구의 요청으로 학동을 받아 수업하는 경우, 향중(鄕中)의 몇몇 유지 또는 한 마을 전체가 조합하여 훈장을 초빙하여 자제를 교육시키는 경우, 그리고 훈장 자신이 생계를 위하여 자기가 직접 설립하는 경우 등이 있었다. 칠곡은 유학이 크게 발달한 곳으로 서원, 정사, 재사 등이 약 130여 곳이 보존되고 있다고 한다. 조선 말기부터 일제 초기에 이르는 동안 학교교육이 보편화 되지 못한 곳에서는 유생들이 자기 집에 서당을 차려 인근 지역의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문 교육을 실시하며 유학의 명맥을 이어 왔다.

[화산서당]

화산서당(花山書堂)석적읍 중리에 있다. 1651년(효종 2)에 만회당(晩悔堂) 장경우(張慶遇)가 후진 양성을 위해 세운 서당이다. 1989년 5월에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20호로 지정되었다. 장경우는 사후 옥계사(玉溪祠)에 배향되었으나 건물의 관리가 잘 되지 않아 퇴폐하였다. 그 후 1840년(헌종 6)에 사림에서 당기(堂基)를 봉두산 남쪽 현 석적읍 중리로 옮기고 건물도 5칸으로 넓혀 중건했다. 원래는 강당 건물만 있었던 듯 하며 현재의 문간채는 터를 옮겨 중건하면서 건립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1844년 당 북쪽에 묘우를 세웠으나 흥선대원군 서원 철폐령으로 1871년(고종 8)에 훼철되어 현재 강당 건물만 남아있다.

강당을 중심으로 둘레에는 방형으로 토석담이 둘러쳐져 있고 정면에 문간채, 좌측면에 일각문이 있다. 강당 뒤로는 울창한 대숲이 있어 운치를 더하고 있다. 마당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일부 건물 부재도 탈락되는 등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그러다가 2005년 사림에서 영남대학교와 협약하여 2009년 11월에 영남대학교 민속관으로 이전 공사를 완료하였다.

[사양서당]

사양서당(泗陽書堂)지천면 신리[웃갓]에 있다. 1651년(효종 2)에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처음에 사수동에 건립한 것을 1694년(숙종 20)에 현위치로 이건하였다. 한강 선생을 주벽으로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를 배향하고 송암(松巖) 이원경(李遠慶)을 별사에 모셨다. 창건 당시에는 묘우(廟宇)와 강당, 폄우제(貶遇齊), 정완재(訂頑齋), 봉하문(鳳下門), 양현청(養賢廳). 주고(廚庫) 등이 있었으나 1868년(고종 5)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고 지금은 경회당과 솟을대문, 변소만 남아있다. 강당인 경회당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5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양서당은 강당과 솟을대문을 ‘二’자형으로 배치하고 주위에 흙 담을 쌓았다. 경회당(景晦堂)은 조선 후기에 지은 이익공계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1칸 반의 규모이다. 솟을대문은 정면 5칸, 측면 1칸의 규모로 가운데 있는 대문간의 지붕을 솟을지붕으로 지었다.

[녹리서당]

녹리서당(甪里書堂)은 기산면 각산1리에 있다. 1890년(고종 27)에 사미헌(四未軒) 장복추(張福樞)가 강학한 곳이다. 사미헌 장복추여헌(旅軒)의 8세손으로 사인(士人)의 아들이다. 조부에게 수학했으며 선공감역(繕工監役), 장원서(掌苑署) 별제(別提), 경상도도사(慶尙道都事) 등의 벼슬을 내려 받았으나 모두 거절하고 오직 학문과 후진 양성에 전념했다.

1890년(고종 27)에 건립된 녹리서당은 퇴락하여 2000년에 산중에서 녹리고택 인근으로 이건하여 중건되었다. 이건 중건 전 서당은 고택의 서산 중턱에 일자형으로 있었다. 규모는 정면 6칸, 측면 1.5칸의 세장방형이었고 좌측부터 온돌방 3칸, 대청 2칸, 온돌방 1칸이 배열되어 있었다. 대청 좌측면 온돌방 2칸 전면으로는 퇴가 있었고 양 측면 온돌방 전면에는 평난간을 두른 내루 형식의 독립 공간이 있었다. 지붕은 맞배지붕이었다. 이건 중건된 녹리서당은 일자형의 현존 서당은 규모가 정면 4칸, 측면 1.5칸으로 중앙에 대청 2칸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 1칸씩을 두고 방 전면에 반 칸의 퇴를 둔 전퇴 중당협실형 건물이다.

[경양서당]

경양서당(鏡陽書堂)북삼읍 율리에 있다. 1841년(헌종 7)에 기산(岐山) 장압이 강학한 곳으로 처음 기산 장압 선생의 위패를 모신 경양서원으로 창건되었으나 1871년(고종 8)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그 후 후손들이 뜻을 모아 1903년에 경양서당으로 중건했으며 중건 기문은 1907년에 완성되었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2칸인데 좌측에서부터 온돌방 2칸, 대청 2칸, 마루 1칸으로 구성되어있다. 특히 대청 우측면은 대청과 구분되는 별도의 마루를 부설하고 주위로 계자난간을 둘렀다. 방은 청방간에 4분합문, 전면에 쌍여닫이 띠살창과 외여닫이 띠살창을 설치했다. 대청 배면과 별도의 마루 사이 즉 우측면에는 쌍여닫이 울거미 널문(당판문)을 두어 공간을 분리했다. 방 뒤편은 반침을 두어 수장 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녹동서당]

녹동서당(甪洞書堂)기산면 각산리에 있다. 1926년에 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이 강학한 곳이다. 본관이 인동인 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은 1905년에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승희 등의 유림과 더불어 ‘청참오적소’를 올렸으며, 1907년 이래 전국적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지방의 보상 회장으로 추대되어 비밀결사가 있을 때마다 대표직을 맡아 항일 투쟁에 앞장섰다.

녹동서당(甪洞書堂)은 창건 당시에는 만서정이라 했으며 ‘녹동서당’이라 편액한 것은 사후에 자손들이 명명한 것으로 추정된다. 서당은 정면 5칸, 측면 1.5칸의 일자형 건물로 평면 구성은 좌측부터 온돌방 2칸, 대청 2칸, 온돌방 1칸 순으로 배열되어 있고 전면에 반 칸 툇간으로 된 전퇴 중당협실형이다.

[공실서당]

공실서당(孔室書堂)은 기산면 각산1리에 있다. 공실서당은 일제강점기인 1929년경 화강(華岡) 장상학이 말년에 안동 도산서원(陶山書院) 상덕사(尙德祠)를 방문하고 퇴계 선생의 학식과 덕망을 본받고자 손수 향리에 서당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고자 하여 건립되었다. 서당의 평면 형태는 일자형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아한 구성을 하고 있다. 좌측에서부터 관선료·화강재·마루(光風霽月)와 방(上帝臨汝)을 연이어 배열했다. 각 방의 전면에는 각기 쌍여닫이 띠살문을 설치했는데 가운데 방인 화강재는 안쪽에 쌍미닫이창을 덧붙여 시공한 이중창 형식이다. 우측의 마루 상부와 화강재 전면 상부에는 ‘공실서당’이라 쓴 현판이 걸려 있다.

[낙연서당]

낙연서당(洛淵書堂)은 왜관읍 석전4리에 위치한다. 완정(浣亭) 이언영(李彦英)의 강학지소로 완석정이라고도 하며 연못에 노을이 비친다는 뜻으로 당호를 정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완석정은 조선 광해군이언영의 별장으로 이용되었던 정자로 낙동강 서안 완석이라는 편편한 바위 근처에 있었다. 1914년에 이곳으로 이건해와 중건하고 최근에 보수와 정비를 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골짜기 사이 평평한 충적지 위에 평평하게 대지를 정지한 다음 방형의 담장을 두르고 일자형의 건물을 앉혔다. 솟을대문인 읍청문(挹淸門) 문간채를 들어서면 정면 5칸, 측면 1.5칸의 건물이 마주하고 있다. 평면 구성은 좌측부터 온돌방 2칸인 양월헌(漾月軒), 대청 2칸인 완석정(浣石亭), 온돌방 1칸인 서운료(捿雲寮)가 연이어 있고 전면에 반 칸 툇마루가 있는 전퇴 중당협실형이다. 건물 정면 어칸 상부에 당호인 ‘낙연서당’이라 쓴 현판이 걸려있고 대청 후면 상부에는 편액이 걸려있다.

[귀암서당]

귀암서당(歸巖書堂)은 왜관읍 석전리에 위치한 귀암(歸巖) 이원정(李元楨)의 불천위 묘우로 귀암고택 내 안채 뒤에 있다. 본관이 광주(廣州)인 귀암 이원정[1621~1680]은 1648년(인조 26)에 진사에 입격한 후, 1670년(현종 11) 사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후 양주목사를 거쳐 도승지에 오르고, 그 후 공조 및 병조, 예조, 호조, 형조의 참판, 대사간, 대사헌, 대사성 등을 두루 역임한 인물이다. 사후 문중에서 이원정(李元楨)을 불천위로 모시게 되었다. 이에 안채 뒤 쪽에 별묘를 세우고 위패를 봉안하게 되었다. 정확한 건립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사후인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한 번 중수를 한 바 있다고 하며, 근래 약 15년 전에는 번와와 단청을 새로이 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주문 형식의 신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정면 3칸, 측면 1칸의 단출한 맞배집으로 구성한 사당이 있다. 전면 각 칸에 심벽을 치고 쌍여닫이 당판문을 설치했다. 구조는 외벌대 낮은 기단 위에 투박한 덤벙 주초를 앉히고 듬직한 원주를 세워 3량가의 상부구조를 받고 있다. 주상부는 아무런 꾸밈없이 장혀만 결구한 장혀수장으로 처리했다. 도리는 모두 굴도리로 처리하였고, 측면의 박공면에는 풍판을 달았는데 도리머리가 보이게 했다. 풍판은 밑면 양단을 사절한 모양이다.

[소암서당]

소암서당(嘯巖書堂)기산면 평복리에 위치한 소암서당투암(投巖) 채몽연(蔡夢硯) 등을 추향했던 소암서원이 1871년 서원 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되자 1932년 3월 4칸의 강당을 복원하여 소암서당이라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소암서당은 경사진 산록을 평평하게 정지하여 방형으로 토석담과 시멘트 블록담을 두르고 ‘-’자형의 강당을 남향으로 앉혔다. 강당 정면에는 팔작지붕의 단칸 4주문이 있고 좌측 담 복판에는 별도의 지붕 없는 철재문을 두어 차량의 진입이 용이하게 했다. 강당의 규모는 정면 4칸, 측면 1.5칸이다. 진입은 정면의 높은 계단을 올라 대문을 지나면 건물 기단 정면의 계단을 통해 대청으로 진입하는 정면진입 구성이다. 평면 구성은 중앙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1칸씩 온돌방을 들이고 방 전면으로 툇간을 둔 전퇴 중당협실형이다.

[하동서당]

하동서당(荷東書堂)은 기산면 봉산리에 위치하고 있는 하잠(荷岑) 박원녕(朴源寧)의 강학지소로 1935년에 건립되었다. 서당의 형태는 평평하게 대지를 정지한 다음 방형으로 시멘트 블록담을 두르고 ‘一’자형의 정사가 앉아있다.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1.5칸으로 작은 규모이다. 진입은 정면의 대문을 지나 건물 기단 정면 2개소의 계단을 통해 대청으로 진입하는 정면진입 구성이다.

평면 구성은 중앙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1칸씩 온돌방을 들이고 방 전면으로 툇간을 둔 전퇴 중당협실형이다. 방 뒤로는 벽장을 두어 수장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방 전면에는 낮은 문하방 위에 쌍여닫이 띠살창을 각각 두고 청방간에는 외여닫이 굽널띠살문을 달아 출입한다. 특히 방 전면 쌍여닫이창 상부에는 환기를 위한 별도의 창을 설치했다. 툇마루 양 측면에는 외여닫이 당판창을 설치해 대청의 공간성을 확보했을 뿐 아니라 통풍성도 고려했다. 대청후면에는 판벽을 치고 쌍여닫이 바라지창을 각 칸에 설치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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