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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301373
한자 書院
영어의미역 Private Confucian Academy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칠곡군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김태훈

[정의]

경상북도 칠곡군에서 조선시대 성리학 연구 및 선현 제향을 위해 설립되었던 사설 교육기관.

[개설]

조선시대 서원의 시작은 1543년(중종 38)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고려 말 학자였던 안향을 배향하고 유생을 가르치기 위하여 경상도 순흥에 세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다. 초기의 서원은 인재를 키우고 선현·향현을 제사지내며 유교적 향촌 질서를 유지, 시정(時政)을 비판하는 사림(士林)의 공론(公論)을 형성하는 구실을 하는 등 긍정적인 기능을 발휘하였다. 하지만 후기로 접어들면서 혈연(血緣)·지연(地緣)관계나 학벌(學閥)·사제(師弟)·당파(黨派) 관계 등과 연결되어 지방 양반층의 이익집단화(利益集團化)의 도구로 전락해 버리고 사액서원의 경우 부속된 토지는 면세되고, 노비는 면역되기 때문에 양민의 투탁(投託)을 유인하여 그들의 경제적 기반을 확대하였다.

서원의 폐단이 심해지자 1864년(고종 1)에 집권한 대원군(大院君)은 서원에 대한 일체의 특권을 철폐하여, 서원의 설치를 엄금하고 그 이듬해 5월에는 대표적인 서원인 만동묘와 화양서원을 폐쇄한 이후 적극적으로 서원 정비를 단행하여, 사표(師表)가 될 만한 47개소의 서원만 남기고 모두 철폐하였다. 조선 후기 서원 철폐라는 분위기 속에서 칠곡군 역시 많은 서원이 훼철되었다. 조선시대 칠곡군의 서원으로는 봉양서원, 자강서원, 곤산서원, 소암서원이 있다. 봉양서원자강서원은 1871년(고종 8)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으며 곤산서원은 1868년에 훼철되었다가 최근 다시 복원되었다. 소암서원 역시 1871년 서원 철폐령에 의하여 모두 훼철되었다가 1932년 3월에 소암서당으로 다시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봉양서원]

봉양서원(鳳陽書院)칠곡군 석적면 중리에 있다. 1789년(정조 13)에 기촌(岐村) 장룡한(張龍翰)안재(安齋) 장유(張瑠)를 봉안하고 강학을 한 곳이다. 봉양서원에 향사 되었던 장용한[1564~1599]은 조선 선조 때 유학자로 일찍이 문장에 뛰어났으며, 율곡 이이의 문인으로 1781년에 비안(比安)의 귀천서원에 배향되었다. 장유[1649~1724]는 1705년 진사에 등제하여, 우암 송시열의 문하에서 종유하고 수암 권상하 등과 사귀면서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다. 봉양서원은 원래 1789년(정조 13) 기산면 죽전리[강정]에 건립되었으나 1871년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그 후 석적읍 중리로 이건 하여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중건했으나 택지 개발로 인해 사라지고 현재는 그 터조차 없다.

[자강서원]

자강서원(紫崗書院)은 칠곡군 북삼읍 인평 2리에 있다. 선암(仙庵) 유창(劉敞)을 배향했던 서원으로 정확한 건립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871년 서원 철폐령 때 훼철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서원이 훼철된 뒤 금오산 아래 현 숭오리 숭산마을로 이건하여 ‘숭양재(崇陽齋)’라 편액하였다. 이곳에는 단칸 건물의 어필각이 있는데 이 또한 같은 시기에 이건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숭오리 숭산마을의 숭양재와 자강사[어필각, 영정각]로만 형태를 알 수 있다. 이건된 자강서원은 숭산마을 남록 경사지에 토석담을 두르고 위에서부터 자강사, 숭양재, 관리사가 일직선으로 놓여 있었는데 전체적으로 장방형으로 추정된다. 맨 위의 자강사는 선암의 영정과 함께 조선 태종이 친히 ‘공심일시(公心一視)’라 쓴 어필을 보관하고 있다. 현재는 자강사만 남아있고 숭양재는 터만 남아있다.

[곤산서원]

곤산서원(崑山書院)은 칠곡군 약목면 복성 1리에 있다. 1773년에 묘우로 건립된 뒤 1783년에 진정(眞靜) 신우덕(申祐德), 극재(克齋) 신익황(申益愰)을 봉안하고 서원으로 승격되어 강학을 한 곳이다. 그러나 1868년에 훼철되어 빈터로 남아 있다가 최근 2004년 이 터에 다시 곤산서원이 복원되었다.

[소암서원]

소암서원(嘯巖書院)칠곡군 기산면 평복리에 있다. 1703년(숙종 29)에 투암(投巖) 채몽연(蔡夢硯), 백포(栢浦) 채무(蔡楙) 부자를 봉안(奉安)하고 강학을 한 곳이다. 1803년(순조 3)에 승원되었고 헌종 13년에는 극명당(克明堂) 장내범(張乃範)을 추향(追享)하였다. 채몽연[1561~1638]은 문장과 시에 능하고 덕망이 높았으며 임진왜란곽재우, 서사원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채무[1588~1670]는 채몽연의 아들로 병조좌랑으로 있을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여러 곳을 다니며 의병 궐기를 호소하였다. 극명당[1563~1640]은 학자로 덕망이 높아 조정에서 여러 차례 불렀으나 끝내 사양하여 후세에 은덕불사로 명성이 높았다. 1703년(숙종 29) 10월에 학자인 장벽·장세휘·박정석 등 20여명이 소암동 팜암바위 뒷산에 사당과 강당을 지어 소암사라 하다가 1803년(순조 3)에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1871년 서원 철폐령에 의하여 모두 훼철되었다가 1932년 3월에 소암서당으로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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