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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301874
한자 六二五戰爭
영어의미역 Korean Conflict
이칭/별칭 6·25 동란,6·25 사변,한국 전쟁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칠곡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일수

[정의]

1950년 6월에 발생하여 3년 1개월 동안 지속된 민족상잔의 전쟁.

[개설]

전쟁의 명칭은 남한에서는 민족 간에 벌어진 전쟁이라는 점에서 전에 ‘6·25 동란’ 또는 ‘6·25 사변’으로 불렸다. 최근에는 ‘동란’ 또는 ‘사변’보다는 전쟁으로 많이 부르고 있는데, 6·25 전쟁 또는 한국 전쟁이 그것이다. 일본에서는 대체로 ‘조선 전쟁’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에서 조선은 북한이 아닌 남북한 전체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북한에서는 혁명적 관점에서 조국 해방 전쟁이라 부르고 있다. 전쟁 발발 당시 남북한의 전투력을 비교해 보면, 지상군의 경우 국군은 9만 6천여 명, 북한군은 19만 6천여 명이었고, 해군의 경우 국군은 7천여 명, 북한군은 4천 7백여 명이었으며, 공군의 경우 국군은 1천 9백여 명, 북한군은 2천여 명 정도였다. 전체 병력은 국군은 1십만 5천여 명, 북한군은 2십만 3천여 명 정도로서 국군은 북한군에 비해 절반 정도였다.

[칠곡의 6·25]

칠곡군은 6·25 전쟁 때 ‘낙동강-반변천-오십천’을 연결하는 전선 최후의 방어선[워커 라인] 역할을 한 곳이자, 전쟁의 최대 격전지였다. 특히 낙동강 방어선에서 왜관에서 다부동 지역을 돌파하면 대구~부산 간을 쉽게 제압할 수 있는 곳이었다. 따라서 국군·유엔군은 2개 사단[국군 제1사단, 미 제1기병사단], 북한 인민군은 5개 사단[1군단의 제1·3사단, 2군단의 제10·13·15사단]을 투입하여 1950년 8월부터 9월까지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곳이다.

[시기별 전투 경과]

제1단계[1950년 8월 1일~12일]에는 낙동강에 도하 후, 주 저항선까지 지연전이다. 이 시기 국군 제 1사단 12연대는 낙정리 일대에서 적 2개 대대를 저지하고 다부동 전투의 첫 교전을 승리로 장식 동 11연대는 해평에 주둔 동 15연대는 3차에 걸친 적 도하공격을 저지하였으나 실패하여 369고지를 피탈당하고 12연대가 투입되어 369고지를 탈환하였다. 제2단계[1950년 8월 13~30일]에는 주 저항선[왜관~다부]에서의 공방전이다. 국군 제1사단은 주저항선에 3개 연대를 배치하고 백병전으로 북한군을 저지하였으며 북한군은 837고지-647고지-진목정까지 진출하여 다부동을 위협함으로서 주 저항선 돌파 위기, 미 8군, B29기로 융단폭격[960톤]을 하였다. 제1단계와 제2단계가 가장 치열하였다.

제2단계의 대표적 전투로는 다부동 전투(多富洞戰鬪)이다. 다부동 전투낙동강 방어선 전투 중 국군 제1사단과 미군과 더불어 북한군 3개 사단을 격멸한 전투이다. 대구 북쪽으로부터 22㎞, 남북으로 대구-안동 국도, 대구-상주 국도가 지나고 있고, 서로는 왜관-다부 지방도로가 이어져 있는 교통의 요지인 다부동은 대구 방어에 전략적 요충지였다. 특히 국군 제1사단이 담당한 328고지[석적면, 현 석적읍]-유학산[839m]-741고지[가산면 금화리]-902고지[가산, 산성]을 연결하는 약 20㎞의 방어선은 남한의 ‘최후의 보루’였다. 따라서 다부동 일원을 두고 국군·유엔군과 북한 인민군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대표적 전투로는 328고지 전투, 유학산 전투[674고지 전투, 837고지 전투], 볼링장 전투, 가산산성 전투 등이 있다.

382고지 전투는 1950년 8월 13일부터 24일까지 왜관 석적면 포남리[현 석적읍 포남리] 일원에서 국군 제1사단 제15연대와 북한군에서 서울을 점령한 공을 찬양받아 ‘서울사단’이라 불린 제3사단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328고지낙동강 건너편 약목(若木) 일대를 향해 횡격실(橫隔室)을 이루고 있어 방어에 유리하며, 이 고지에서 동으로는 465고지[岐般山]-714고지[白雲山] 능선을 타고 사단 후방지역으로, 남으로는 303고지[작오산]를 거쳐 왜관으로 나아갈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북한군 제3사단이 이곳을 집중 공격하면서 전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정상의 주인이 15번이나 바뀌는 치열한 전투로, ‘7퇴(退) 8환(還)의 혈투(血鬪)’에서 제15연대가 마지막 승리를 쟁취하였다.

유학산 전투는 1950년 8월 13일부터 23일까지 가산면 다부리·학산리 일대에서 국군 제1사단 제11·12연대와 북한군 제15·13·1사단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유학산과 동쪽 줄기는 837-790-674고지 일대는 해발 800m이상의 분수령 능선이 동서로 4㎞나 뻗어 있는 험준한 고지로서, 우리나라 고지의 특징인 북고남저의 현상이 뚜렷하였다. 뿐만 아니라 유학산의 고지는 5번과 25번 도로를 통해 대구로 들어 갈 수 있는 가장 유리한 지점이다. 따라서 5번·25번 도로를 제압하여 대구를 공격하는데 가장 유리한 발판이 되었기 때문에 국군과 북한군은 지키고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하였다. 제12연대는 제3대대를 유학산 주봉인 839고지에 배치해 놓고 제2봉인 837고지에 제1대대를 배치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북한군이 먼저 점령함에 따라 이 고지를 탈환해야 했다. 우선 1950년 8월 22일 우측 다부동의 제11연대 제3대대가 674고지를 탈환한 후 위봉(威鳳) 골재까지 진출하였다. 그 뒤 8월 23일 2시 무렵 제11연대 제1대대는 837고지를 탈환한 후 820고지를 넘어가 제3대대와 만나고, 북쪽 경사면 5~6능선까지 진출하여 북한군 패잔병을 제압하였다. 같은 날 새벽 6시 무렵 좌측의 제3대대도 유학산 주봉을 탈환하였다. 이로써 1950년 8월 13일부터 23일까지 벌어진 혈전에서 국군이 유학산을 탈환하였다. 유학산 일대를 탈환하기 많은 국군이 희생했다.

볼링장(Bowling Alley) 전투는 1950년 8월 18일부터 8월 23일까지 가산면 다부(多富)·금화(金華)·천평리(泉坪里) 일대에서 미 제27·23연대와 국군 제1사단 제11·15연대 및 제8사단 제10연대 대 북한군 제1사단·제13사단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8월 15일 북한군 제1사단은 다부 동북 방향으로, 제13사단 일부는 다부 정면의 금화(金華)로, 제15사단은 유학산으로 공격해 옴에 따라 미 제23·제27연대와 국군 제11·제15연대가 연합하여 북한군을 물리쳤다. 볼링장 전투는 1주일 동안의 한미연합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상징적인 사례이다.

가산산성 전투는 1950년 8월 18일부터 8월 27일까지 가산면동명면(東明面) 일대에서 국군 제8사단 제10연대, 육군 본부 유격 대대, 미 제2사단 제23연대 대 북한군 제1사단 제14연대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가산은 해방 902m 높이에 가산면 가산리에 위치해 있으며, 칠봉산(七峰山)이라고도 하며 팔공산과 연결되는 곳이다. 이 전투에서 국군 제10연대 제1대대의 경우도 제4중대의 병력 180명이 장교 1명과 병사 10여 명이 남게 되었고, 제12·3중대도 각 40명에서 70명으로 감소될 정도로 피해를 입었다.

제3단계[1950년 8월 31~9월 15일]에는 전투지대 재조정 후, 동명·기천 일대의 공방전이고, 제4단계[1950년 9월 16일~9월 24일]에는 반격을 위한 북한 방어선 돌파이다. 이 두 시기의 전투를 ‘9월의 공방전’이라고 부른다. 왜관-다부 전선은 8월의 위급 상황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전체적으로 전열이 흐트러져 있었다. 이에 다부동의 미 제27연대·제23연대를 소속 사단으로 복귀시키고, 전투 지경선을 재조정하여 다부 정면 가산까지를 미 제1기병사단이 맡고, 국군 제1사단은 그 우측 팔공산 산악지대 정면을 맡았다. 낙동강 방어선에서 북한군의 9월 총공세는 9월 2일부터 감행되었고, 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되기까지 일전 일대의 공방전이 벌어졌다. 9월 4일 8월 공방전을 통해 확보한 왜관-다부 일대의 주저항선이 북한군의 공세에 의해 붕괴되었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실시되던 날 미 제8군은 제24사단을 대구 부근으로 이동키시고, 제1군단은 반격 준비를 했다. 9월 16일 유엔군의 총반격이 시작되었다. 국군 제1사단은 팔공산-가산 일대에서 북한군을 빠르게 격퇴시켰다. 그 뒤 9월 22일 미 제8군은 낙동강 전선 각 부대에 작전 명령 A 108호를 발해 북한군에 대한 전면적인 추격을 명령하였다. 이날 제15연대가 가산면 천평 일대에서 365고지-금화리 진동(陳東)으로 남진하여 미 제14기병사단과 협공을 펼치자 다부 일대의 북한군 제13사단은 와해되기 시작하여 병력의 일부만 경북 상주(尙州) 방면으로 패퇴하였다. 이로써 낙동강 방어선에서 벌어진 왜관·다부동 공방전은 유엔군과 국군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칠곡군 일대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칠곡 주민들은 ‘전시 국민생활 요강’에 따라 근검절약하고, 청·장년들은 왜관~다부 격전지의 보급부대(報國隊)[1개 대대 평균 50~60명]에 참가하였다. 학생들도 긴급 모병에 자원하고 여학생들은 의료·구호에 나섰다. 행정기관은 전재민(戰災民) 식량배급[1인 1일 3합 기준], 의료·주거시설 보급, 피난민들에게 공공건물과 민가를 알선, 임시 수용소와 급식소 설치, 고아 수용 등 일련의 구호 사업을 전개했다. 6·25 전쟁에 참여한 무공 수훈자는 왜관읍 출신 36명, 북삼면·지천면 각 3명, 가산면·석적면·기산면·동명면 2명, 약목면 1명으로 총 51명이다.

[의의와 평가]

칠곡군 일대의 전쟁이 멈춘 뒤 나라를 위해 목숨을 지킨 국군·민간인들의 전적(戰績)을 담은 2개 탑, 6개 비, 2개 기념관 등이 설립되었다. 우선, 충혼탑(忠魂塔)은 1955년 10월 3일 왜관읍 석전리 산 63-4번지에 건립되었다. 왜관 지구 전투 전승비(倭館地區 戰鬪 戰勝碑)는 1959년 3월 31일 육군 제1205 건설 공병단이 왜관읍 석전리 산 63-4번지에 건립하였다. 충혼탑(忠魂塔)은 1972년 왜관읍 삼청 2리 산 15-10에 부지 9,521㎡에 높이 20m로 건립되었다. 다부동 전승비(多富洞 戰勝碑)[유엔전승비]는 1971년 12월 15일 제2군사령부와 경상북도가 가산면 금화리 125번지에 미 보병 제27연대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었다. 왜관 지구 전적 기념관(倭館地區 戰績記念館)은 1978년 7월 1일 교통부에서 석적면 중지리 산 33번지에 부지 4,749평에 건평 1동[140평], 기념비 1기[3.95m], 동상[조국수호용사, 자유수호인] 등을 세웠다. 다부동 전적 기념관(多富洞 戰績記念館)은 1981년 11월 30일 전두환 대통령이 지시하여 국방부에서 부지 7,354평에 건평 2동[87평], 기념비 1기[25m], 동상[4인군상(人軍像), 승리여신상] 등을 세웠다. 순국 경찰관 위로비(殉國警察官 慰勞碑)는 1988년 10월 29일 왜관읍 석전리 산 63-4번지에 설립되었다. 미군 포로 희생 추모비(美軍 捕虜犧牲 追慕碑)는 1990년 6월 왜관읍 석전리 미 캠프 캐롤 부대 내에 건립되었다. 한편 6·25 전쟁 때 국군 제1사단장이었던 백선엽 장군에 대한 업적을 기리기 위한 비로는 백선엽 장군 호국 구민비(白善燁將軍 護國救民碑)와 백선엽 장군 전적비(白善燁將軍 戰績碑)가 있다. 백선엽 장군 호국 구민비는 1951년 4월 칠곡군수 김옥현 외 4인이 가산면 다부리 414-5번지에 건립하였다. 백선엽 장군 전적비는 1973년 9월 13일 동명면 금암리 30-2번지 동명 초등학교 교정에 세워졌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0.09.10 오류 수정 북한 인민군은 4개 사단[1군단의 제3사단, 2군단의 제1·13·15사단]을 투입하여 ->북한 인민군은 5개 사단[1군단의 제1·3사단, 2군단의 제10·13·15사단]을 투입하여
2020.08.31 수정 자고산->작오산
이용자 의견
이** 200자가 넘어서 내가쓰는백과에 글을 남겼습니다. 확인 후 반영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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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기하신 의견과 관련하여 콘텐츠의 오류를 확인할 수 있는 객관적 자료를 보내주시면 검토 후 반영하겠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2020.07.24
이** 제가 6/24 댓글을 달았는데 수정도 안 되어 있고, 답변이 없어서 궁금합니다. 빨리 확인해서 수정바라며, 제가 올린 다른 댓글도 확인해서 고쳐주시기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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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비정상적 민원 제기로 처리가 지연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2020.07.17
이** 자고산이 아니라 작오산 입니다. 수정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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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기하신 의견에 따라 내용수정을 완료했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2020.07.14
이** 북한 인민군 5개 사단[1군단 1사단, 3사단, 2군단 10사단, 13사단, 15사단]이 참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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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기하신 의견에 관한 자료를 보내주시면 검토후 반영하겠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2020.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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