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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301912
한자 八居縣
영어의미역 Palgeo-hyeon Local Administration District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지역 경상북도 칠곡군
시대 고려/고려,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임삼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고려시대 및 조선 중기(1640년)까지 사용된 지방 행정 구역
관련문헌 『고려사(高麗史)』|『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세종실록世宗實錄」]|『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여지도서(輿地圖書)』

[정의]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칠곡 지역에 있었던 지방 행정제도.

[개설]

고려 태조팔리현에서 팔거현(八居縣)으로 고쳤다가 뒤에 발음이 같은 거(莒)로 고쳐 팔거현(八莒縣)이라 하였다. 이때부터 1640년(인조 18) 이전까지는 팔거현(八居縣)으로, 1640년 이후부터 1896년 지방 행정구역 개편 전까지는 칠곡도호부(漆谷都護府)로 불렸다. 삼국시대·남북국시대에는 팔거리현 혹은 북치장리(北恥長里) 혹은 인리(仁里)라 불렸다. 757년(경덕왕 16)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팔거리현에서 팔리현(八里縣)으로 변경되어 남북국시대까지 사용되었다.

[형성 및 변천]

고려 태조(太祖)팔리현(八里縣)을 다시 팔거현(八居縣)으로 고쳤다가 뒤에 발음이 같은 거(莒)로 고쳐 팔거현(八莒縣)이라 하였다. 1018년(현종 9)에는 팔거현을 수창군(壽昌郡)[현 대구광역시 수성구]에서 지경산부사(知京山府事)[현 성주]에 소속시켰다. 칠곡(七谷)이라고도 불렸다. 1640년(인조 18)에 관찰사(觀察使) 이명웅(李命雄)가산(架山)에 성(城)을 쌓았는데, 고을 수령(守令)이 산성을 다스리는 곳[현 星州]과 거리가 멀어서 다스리기 어렵다고 요청함에 따라, 조정에서는 팔거현칠곡도호부(漆谷都護府)로 승격시켰다. 1819년(순조 19) 칠곡도호부의 관아(官衙)가 산정에 있어 불편한 점이 많아 팔거현의 본래의 땅 읍내[현 대구광역시 북구]로 179년 만에 복귀하였으며 산성에는 별도로 성을 지키는 병사들만 두게 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칙령 제98호로 23부제 실시에 따라 칠곡도호부를 칠곡군으로, 인동도호부는 인동군으로 고쳐 대구부에 편입되었다. 1896년 3월 6일에 대구부에서 분리되어 칠곡군과 인동군은 경상북도에 편입되었다. 칠곡군은 팔거(八莒)·퇴천(退川)·문주(文朱)·노곡(盧谷)·파미(巴彌)·동북(東北)·서북(西北)·하북(下北)·이언(伊彦)·상지(上枝)·도촌(道村) 등의 11개 면을 관장하였다. 인동군은 읍내(邑內)·동면(東面)·북면(北面)·문량(文良)·장곡(長谷)·석적(石赤)·기산(枝山)·약목(若木)·북삼(北三) 등의 9개 면을 관장하였고, 1911년 인동군청이 인동읍내에서 약목으로 옮겼다.

조선시대 팔거현의 규모로는 팔거(八莒)의 호수는 3백 47호, 인구가 1천 4백 80단(單) 1명이었다.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1백 97명, 영군(營軍)이 63명, 진군(鎭軍)이 1백 28명, 선군(船軍)이 7백 68명이었다. 팔거(八莒)의 성(姓)은 도(都)·현(玄)·임(任)이고, 백성(百姓)의 성은 전(田)·변(卞)이고, 내성(來姓)이 배(裵)·임(林)이었다.

[위치비정/행정구역상의 구분]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지천면·동명면·가산면 일부와 대구광역시 북구 칠곡 일대이다.

[관련기록]

『고려사(高麗史)』 제57권 지 제11 지리 2 상주목 경산부에서는 “팔거현은 원래 신라의 팔거리현(八居里縣)[북치장리(北恥長里) 또는 인리(仁里)라고도 한다]인데 경덕왕은 팔리(八里)로 고쳐서 수창군(壽昌郡)의 관할하에 현으로 만들었다. 고려 초에 팔거(八居)[후에 거(居)자는 발음이 같은 거(莒)자로 되었다]로 고쳤으며 현종 9년에 본 부에 소속시켰다. 칠곡(七谷)이라고도 부른다.”라고 되어 있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제15권 여지고 3 군현연혁 1 승국 이상 고려 경상도에서는 “경산(京山)의 속군은 1인데, 고령군(高靈郡)이고, 현이 14인데, 약목현(若木縣)·인동현(仁同縣)·지례현(知禮縣)·가리현(加利縣)·팔거현(八莒縣)·금산현(金山縣)·황간현(黃澗縣)·관성현(管城縣)·안읍현(安邑縣)·양산현(陽山縣)·이산현(利山縣)·대구현(大丘縣)·화원현(花園縣)·하빈현(河濱縣)이다.”라고 되어 있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제17권 여지고 5 군현 연혁 3 경상도에서는 “중종(中宗) 14년(1519)에 본도(本道)의 일이 번다(煩多)하다 하여 좌도 감사(左道監司)와 우도 감사(右道監司)로 나누어, 낙동강(洛東江) 이동을 좌도(左道)에 속하게 하고, 그 이서를 우도(右道)에 속하게 하였으나 동년(同年)에 폐단이 많으므로 파(罷)하고 1도(道)로 삼았다. 선조(宣祖) 25년(1592)에 왜구(倭寇)가 쳐들어와 도로가 통하지 아니하므로, 또 좌감사(左監司)·우감사(右監司)로 나누어 좌감영(左監營)은 경주(慶州)에 설치하고, 우감영(右監營)은 상주(尙州)에 설치하여 병사(兵使)·수사(水使)를 절제(節制)하다가, 26년(1593)에 다시 합하여 하나로 하고, 감영(監營)을 성주(星州) 팔거현(八莒縣)에 두었으니, 곧 〈명(明)나라〉 총병(摠兵) 유정(劉綎)이 주둔하던 곳이다. 삼국시대 팔리현(八里縣)은 본래 팔거리현(八居里縣)으로, 경덕왕 때 팔리(八里)로 고쳤다. 별호(別號)를 칠곡(漆谷)이라 하고 일명 북치장리(北耻長里), 또는 인리(仁里)라 한다. 고려시대 팔거현(八莒縣)현종 때 경주(慶州)에 편입시키고, 칠곡(漆谷)이라고 불렀다. 조선시대 칠곡군(漆谷郡)은 인조 18년(1640)에 가산(架山)에 성을 쌓고 비로소 부를 설치하였다. 고종 32년(1895)에 대구에 편입시켰다가 곧 다시 군을 설치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세종실록지리지 경상도 상주목에서는 “팔거현(八莒縣)은 본디 팔거리현(八居里縣)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팔리(八里)로 고쳐서 화원(花園)과 함께 모두 수창군(壽昌郡)의 영현(領縣)을 삼았고, 고려에서 팔거(八居)로 고쳤다. 별호(別號)는 칠곡(七谷)이다. 그 뒤에 거(居)의 음(音)이 바뀌어서 거(莒)가 되었다. 위의 세 현(縣)은 현종 무오년에 모두 경산부(京山府) 임내(任內)에 붙였다. ”라고 되어 있다. 또한 『여지도서(輿地圖書)』 경상도 칠곡(㓒谷) 건치연혁에서도 관련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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