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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부동은 대구 방어의 요충지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3B020103
분야 지리
지역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정재술

대구 북방 22㎞ 지점에 있는 다부동은 대구에 이르는 관문이자, 성주와 안동에서 대구로 통하는 국도가 합쳐지고 왜관에 이르는 지방도로의 시발점이 되는 곳이다. 또 마을을 중심으로 북서쪽에는 유학산이 북방을 향하여 횡으로 능선을 이루고, 그 우측에는 가산팔공산에서 뻗은 고지 군으로 둘러싸여 있어 방어에 유리하다. 그리고 만약 다부동이 적의 수중에 떨어지면 당장 대구가 적의 지상포 사정권내에 들어가게 된다. 그만큼 다부동은 전략적으로 대구를 방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요충지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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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부슈퍼 앞 도로

이런 이유로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은 이 다부동 일대에 병력과 화력을 대거 투입했다.

북한군 13사단과 3사단, 1사단, 15사단 등 군단 병력 21,000여 명을 다부동 정면에 배치하여 대구를 조기에 점령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에 맞선 국군 1사단 병력은 학도병을 포함해 겨우 7,600여 명에 불과했다. 또 국군은 장비와 화력 면에서도 북한군에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열세에 있었다. 국군 1사단 화력은 105㎜ 곡사포 12문을 비롯해 160문 정도였는데, 적은 122㎜ 곡사포 20문을 비롯해 총 670문의 화력을 갖추고 있었고, 거기에다 T-34전차가 20여 대나 있었다. 병력은 1 대 3, 화력은 1대 4 비율이었다. 다부동 전선 최대의 위기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정작 국군 1사단 장병들은 그 당시 다부동 일대에 그렇게 많은 규모의 북한군이 몰려들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장병들은 지레 겁을 먹을 필요가 없었다고 하니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일이 아닌가. 당시 국군 1사단은 북한군의 막강한 병력과 화력에 눌려 고전을 면치 못했고, 8월 15일경 사단 전 전선이 위기의 절정에 다다랐다. 즉 좌측 15연대는 328고지를 탈취했다가 다시 빼앗기는 등 혼전이 거듭되었고, 중앙 12연대는 수암산과 유학산의 가파른 암석을 힘겹게 올라가 적에게 역습을 가하는 등 처절한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국군 1사단 사령부에는 미 수석군사고문 중령 밑에 3명의 장교가 각각 작전, 군수, 통신 분야 참모 고문으로 작전에 임하고 있었는데, 작전 고문관 메이 대위가 다부동 저항선의 위태로운 상황을 걱정하며 백선엽 사단장에게 “장군님, 아무래도 안 되겠으니 부대 증원을 요청해야 하겠습니다.” 했다. 백선엽 사단장은 “다들 병력이 모자랄 텐데 그게 가능하겠느냐?” 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는 자신이 2군단과 미 8군 참모부에 그 필요성을 말했다면서, 다부동 방어선 병력 지원을 상급부대에 요청해 보라고 제안했다.

백선엽 사단장은 즉시 참모장을 시켜 군단사령부에 병력 지원을 요청케 하고, 메이 대위는 미 8군사령부로 병력 지원을 요청했다. 그리고 얼마 안 돼 지원부대를 보내겠다는 연락이 왔다. 미 8군사령부에서는 미 25사단 27연대를, 육군본부에서는 국군 8사단 10연대를 보내 주겠다는 것이다. 그 당시 국군 1개 사단 방어지역에 이렇게 2개 연대를 증원해 준 사례는 단 한 번밖에 없었다고 하니, 다부동 일대의 전투 상황이 얼마나 위태롭고 중요한 전투였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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