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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곡도호부 아래 번창했던 남창마을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3C010103
분야 지리
지역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남원리 남창마을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최엄윤

남원리는 원래 칠곡군 하북면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남창·하원·양지 일부를 병합하여 남원동으로 이름하고 현 동명면에 편입되었다.

옛 남창마을과 관련하여 전하는 자료는 많지 않다. 1954년의 집중 폭우로 인해 마을이 거의 사라지다시피하여 그 이후 새로운 남창마을을 만들었다는 기록을 제외하고 100년 전, 200년 전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다.

그나마 가장 오래된 기록은 300년 전의 관찰사 이세재에 관한 기록이다.

다행히 1872년에 제작된 「칠곡지도」가 남아 있어 남창마을의 옛 모습을 그나마 상세히 알 수 있다.

1999년 대구대학교에서 실시한 지표조사 결과를 보면 해원정사 북편의 ‘옛 남창마을’ 일대에는 마을이 번화했던 당시의 모습을 살필 수 있는 담장 유구와 축대, 우물지 등이 유존하고 있다.

특히 이 일대는 남창 이외에 사금부, 후당, 수렴청 등의 관아가 있었던 구지로 추정되므로 이곳을 정비하여 놓을 필요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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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원정사

그리고 「칠곡지도」로서 남창 일대에 시장이 섰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2002년 발간된 『(국역)칠곡지』에도 끝 날짜가 4일과 9일에 서는 오일장인 남창시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1872년경 이 일대에는 100여 호의 가구가 살았다고도 하고 200호, 또는 300호의 가구가 살았다는 기록과 이야기들이 있는데, 이는 아마도 1640년 가산산성 내성이 완성되면서 성주목에 소속돼 있던 ‘팔거현’이 ‘칠곡도호부’로 승격돼 청사를 산성 안에 설치함으로써 당시 산성 안의 인구가 급격히 늘어났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실제 당시의 면 단위인 방(防)은 산성방·동북방·서북방 세 개로 나누어지는데, 그 중 산성방(山城防)은 칠곡부에서 30리 떨어진 거리에 있었고 성내촌·남창리·성남외촌·북창리 등의 마을이 있었다.

그 옛날 번화하던 시절을 증명이라도 해주듯 남원2리, 곧 남창마을을 통해 가산산성을 오르는 길을 주민들은 아직도 장터걸이라 부른다고 남창마을 새마을지도자 송영수 씨는 전한다. “옛날엔 장터걸이라 그랬는데 길을 갖다가 걸이라 그랬는 거예요. 장터 가는 길이라 이 말이라. 우리가 산성 안에 살았을 적에는 우리는 그때 나이가 어려서 모르잖아요. 그 위에 어른들이 살 적에는, 아주 옛날에는, 여기 관찰사가 여(여기) 살고 할 적에 그때는 시장이 여(여기) 어디 섰나 봐요. 그래서 장터 가는 길…… (중략) 아직까지 우리가 부르는 이름은, 외지에서는 가산산성 가는 길이라 얘기를 할 테고 우리는 장터걸이라 이칸다고(부른다고).”

남창마을 주민 중 한 사람인 해원정사 주지스님도 그 옛날 번화했을 남창을 상상하며 다소 신빙성 있는 설명을 해 주신다. “여(여기) 칠곡도호부가 있었으니까, 그렇잖아요. 도호부면 지금 도청, 저 위에(남창마을 윗동네를 말씀하시는 듯함) 약 300호 되는 양반들이 살았대요. 여기 성 바로 안에는 상당히 거리가 멀거든, 한 시간 더 걸린다 말이야. 남창은 그러니까 가마차 밀고 하는 사람들이 살았겠지. (중략) 도호부가 있었으니까 양반들이 들락거리고 하니까 활성화됐었겠지.”

그리고 남창마을이 붐볐을 또 다른 이유 하나는 바로 천주사라는 사찰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천주사는 1701년 경상감영의 명으로 외성 가운데 설립되어 승창미를 보관하던 사찰이었다. 해원정사에서 약 20분 정도 걸어가면 나오는데, 현재는 절터만이 남아 있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나타난 경상도관찰사 김상로의 절목(節目)에 있는 내용에 의하면, 영남 제일의 관문인 가산산성에 절을 짓고 승려를 모집하여 궁술을 연습시켜 춘추로 시사(試射)하여 승장을 뽑는 방식이 있었다고 하였다. 비록 사찰 때문에 마을이 활성화되었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겠지만, 숭불정책을 쓰던 조선시대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승창미를 보관하고 승병까지 갖추고 있던 천주사의 규모와 권력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고 성안 마을의 위력 또한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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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사터

이쯤 되면 우리는 칠곡도호부가 있고 천주사라는 큰 사찰이 있던 가산산성 입구 남창마을의 장날 모습과, 당시 공무원들이었던 도호부의 식솔이나 그들을 상대로 경제를 꾸려 나가던 시장상인들로 붐볐을 장터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정보제공]

  • •  송영수(남, 1946년생, 남창마을 거주, 남창마을 새마을지도자)
  • • 해원정사 주지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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