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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301902
한자 農村-美軍部隊-明暗
영어의미역 The Light and Shade of the U.S. Army Unit Campcarol Which Sprouts the Nest in the Farming Village District of a Province
이칭/별칭 왜관미군부대
분야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지도보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홍상철

[정의]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에 주둔하고 있는 주한 미군의 병참 부대.

[개설]

캠프 캐롤은 무엇을 하는 곳인가? 하는 의문을 가지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왜관읍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부대다.’ 이렇게 대답하면 너무나 상식적인 대답이 될 것이다. 캠프 캐롤칠곡군 왜관읍에 주둔하고 있는 주한 미군의 병참기지의 일종이다. 1959년에 부대 조성 공사를 시작해 이듬해인 1960년 5월에 완공하고 주둔했다. 왜관읍 왜관리석전리 일원에 3.2㎢ 규모로 조성되어 주로 주한 미군의 병참과 통신, 병기, 의무, 화생방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부대 구성원은 주한 미군과 카투사, 한국인 직원, 한국인 근로자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종사자들을 위한 복지관과 체육관, 수영장, 볼링장, 테니스장, 도서관, 면세점, 미군 전용 클럽 등의 복지시설이 있다. 부대 이름은 제5보병연대 72 전투공병중대 소속 찰스 캐롤(Charles F. Carrol) 중사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캐롤 중사는 6·25전쟁에 참전하여 임무 수행 중에 전사했고 사후에 청동무공 십자훈장이 주어졌다.

[미군과의 첫 만남]

칠곡군에 있어서의 미국과의 실질적인 첫 만남은 언제였을까 하는 의문을 가져본다. 칠곡군과 미국과의 첫 만남은 6·25전쟁이 가져다주었다고 볼 수 있다. 1950년 6월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전 국토는 물밀 듯이 몰려오는 북한군에 밀려 끝없이 ‘남으로 남으로’ 내려왔다. 급기야 유엔 안보리의 결의에 세계 16개국으로 구성된 유엔군이 6·25전쟁에 참전함으로써 남침의 기세는 낙동강에서 멈추었다.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양진영이 벌이는 치열한 전장에서 우리는 처음 미군을 만났다. 처음으로 만난 우방국의 국민이 민간인이 아닌 군인이었다는 사실이 우리에겐 크나큰 비극이었다.

처절한 비극의 현장에서 처음 만난 미군들은 그해 8월과 9월 두 달 동안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 낙동강유학산 일대에서 수많은 피를 흘리면서 자유 수호를 위해 싸웠다. 55일간의 기나긴 시간 동안 한미연합군이 힘을 합쳐 북한의 도발을 물리친 전승을 기념하는 전승비가 세워져 있다. 다부동전승비[유엔전승비]는 1971년 12월 15일 제2군사령부와 경상북도가 건립한 것이다. 비극의 전장에서 만난 미군과 칠곡군의 만남은 전승비의 내용처럼 영원히 서로가 서로를 돕는 혈맹의 관계로 이어지길 기대한다. 그런 인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로부터 10년 후인 1960년 캠프 캐롤칠곡군 왜관읍에 주둔함으로써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캠프캐롤이 왜관에 온 이유]

주한 미군이 우리 땅에 들어온 것은 1945년 9월 8일 이었다. 당시에는 주둔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더불어 일본군의 완전한 항복을 받기 위하여 진주했었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까지 군정 업무를 수행하다가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이듬해인 1949년 500명의 군사고문단만 남기고 철수했으나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하게 되었다. 휴전협정이 체결된 이후 1953년 10월 1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됨으로써 합법적으로 주둔하게 되었다.

이후 전국에 많은 미군 부대들이 주둔하게 되면서 칠곡군에는 1960년 캠프 캐롤이 주둔하게 되었다. 어느 곳이나 군부대들이 주둔할 경우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럼 칠곡군청의 소재지인 왜관읍 캠프캐롤이 주둔한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경부선 철도와 국도 4호선을 끼고 있어 교통이 편리한 점이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낙동강을 끼고 당시 전국의 3대 도시였던 대구를 끼고 있는 전략 요충지였기 때문일 것이다. 칠곡이 전략적 요충지였다는 것은 예전의 군사전문가들도 일찌감치 간파한 듯하다.

칠곡군은 예로부터 교통의 요충지로 알려졌다. 조선시대 부산에서 ‘대구~칠곡~선산~문경새재~서울’로 가는 영남대로의 중심이었다. 낙동강 수로를 이용해서는 부산에서 밀양, 창녕을 거쳐 왜관까지 배가 바로 들어 올수 있는 곳이었다. 근대에 들어서는 경부선 철도가 개설되고 국도 4호선이 열림으로서 교통의 중심지인 동시 전략상 요충지로 더욱 각광받게 된 곳이다.

이러한 요인으로 인하여 많은 수난을 겪기도 했다. 임진왜란이 발발(勃發)했을 때는 왜군의 1선봉대가 동래에 상륙해 대구~칠곡~선산~문경새재를 거쳐 한양으로 진격하는 주 침략로가 되어 많은 피해를 입었다. 조선의 요청에 의하여 명나라군이 진주했을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조선에 진주한 명군은 의주에서 평양을 거쳐 남하하면서 조선군과 연합해 왜군을 몰아내는 전투를 벌이면서 주요 전략 요충지에 주둔했다. 많은 주둔지 중의 하나가 칠곡도호부였다. 명군의 지휘부가 교통의 편리함과 가산산성의 전략적 가치를 보고 산성 아래에 5천여 명의 명군을 주둔 시킨 것이다. 명나라 군은 왜군을 몰아내고 조선을 구한다는 명분으로 원병을 파견하여 왜군을 물리치는데 큰 힘을 보탠 것은 사실이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 백성의 간접 피해도 만만찮았을 것이다.

[조용하던 농촌 마을에 불어온 변화의 바람]

1960년대 농촌 지역의 모습은 어느 곳이나 대동소이하다. 서울과 부산과 같은 대도시를 제외하고는 어느 지역이나 그곳이 그곳이라고 할 만큼 다른 모습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우리의 농촌 모습을 외양부터 바꾼 새마을운동이 아직 시작되기 전이라 초가집이 아니면 기와집 둘 중의 하나였다. 간간히 일본식 가옥이 남아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이 초가집이었다. 사람들의 모습은 어떠했는가. 모두가 헐벗고 굶주렸다. 몇몇 부잣집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언제나 먹을거리를 해결하는 것이 최대 과제였다. 입는 걱정은 그 다음이었다. 의식주 중에서 어느 하나도 온전히 해결된 것이 없는 어려운 생활의 연속이었다. 그것은 칠곡군이나 다른 지역이나 틀린 점은 없었다. 모든 농촌 지역이 보릿고개를 넘기기가 벅찬 시절이었다.

이러한 때에 캠프 캐롤이 왜관에 들어오면서 주변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당시엔 캠프 캐롤이란 생소한 이름은 그저 이상한 미국말로만 들렸다. 단지 미군 부대가 들어 왔다는 사실만 알 뿐이었다. 미군 부대가 들어옴으로써 조용하던 농촌 마을이었던 왜관은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밀물처럼 몰려왔다는 말이 과언은 아니었을 것이다. 먼저 사람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왜관 보다 먼저 미군부대가 주둔했던 평택, 의정부, 동두천, 부산 등 전국 각지에서 거주하던 미군 부대 종사원들이 이주해 왔다. 이들과 함께 보기에도 신기한 외국인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백인과 흑인 병사들은 신기함과 동시에 두려움을 함께 가진 이방인이었다. 하루아침에 조용하던 농촌 마을이 외국 도시가 된 분위기였다. 특히 미군 부대 주변인 석전리 일대는 더했다. 외지에서 사람들이 유입되면서 왜관 시가지는 사람들로 넘쳐나기 시작했다. 경제적으로 부유했던 종사원들의 유입으로 인해 지역경제 활성화와 함께 먹을 거리 해결이 한층 더 수월해졌다.

[지역경제의 활성화에 기여한 미군 부대]

캠프 캐롤이 왜관에 주둔한 지도 50년에 가까워지고 있다. 그런데 한국의 경제가 발전하고 생활수준이 향상되면서 이제는 어느 지역이나 미군 부대가 미운 오리처럼 변해 버렸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자기 지역에서 떠나 줄 것을 주문하고 있는데, 도시 발전에 장애가 된다는 이유에서다. 왜관에 캠프 캐롤이 주둔을 시작할 당시인 1960년에는 어떠했을까. 왜관뿐만이 아니고 어느 지역이나 환영할 마음도 반대할 마음도 없이 정부의 방침에 따라 주민들은 지켜만 보았다. 그러나 막상 미군이 주둔하면서 시작된 변화는 가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다.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이 인구 증가다. 당시 칠곡군의 인구 변화를 보면 당시의 변화를 짐작할 수 있다. 미군이 처음 주둔 했던 1960년의 칠곡군 인구는 94,684명이었다. 이듬해인 1961년엔 103,596명으로 늘어났다. 1년 만에 8,912명이 늘어났다. 이전에 매년 1천여 명이 증가하던 것과 비교하면 폭발적이라 할 수 있다. 이중에서 왜관읍에서 늘어난 인구는 3,783명이었다. 그때 늘어난 인구의 대부분이 캠프 캐롤이 주둔한 왜관읍을 중심으로 늘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늘어나는 인구만큼 달라진 지역 경제가 활성화 됐다는 점이다. 미군 병사와 종사자들이 받는 봉급은 대단히 높은 편이었다. 당시 공무원들의 봉급은 7천원 정도였다. 반면에 미군 병사들의 봉급은 700~800달러로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대량 30~40만원 정도였다. 미군 부대 종사원들의 봉급은 3만원 정도였다. 미군 병사는 예외로 하더라도 한국인 종사자의 봉급도 공무원 봉급의 4~5배를 받았다. 일반 직장의 근무자의 입장에서 보면 상상할 수 없는 봉급액이었다. 요즘 말로 하면 ‘신이 내린 직장’이라 할 정도로 부러운 직장이었다.

높은 봉급을 받는 미군 병사와 한국인 종사자들의 소비력은 당시로서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또한 이들은 동두천이나 평택 등에서 이미 높은 소비생활을 하던 경험을 가진 부유한 계층이었다. 높은 소비성향을 가진 미군 부대 종사원 덕분에 왜관 시가지는 흥청망청 한다고 할 정도로 붐볐다. 우리의 근무시간은 오전 9시에서 오후 6시까지다. 물론 야간 근무자도 있지만 대부분은 오후 6시에 퇴근한다. 미군 부대 종사자들은 오전 8시에 출근해 오후 5시에 퇴근한다. 따라서 오후 5시만 되면 당시 1번 도로변의 식당과 술집은 호황을 누렸다.

지역경제 활성화에는 주택 임대료의 상승도 한몫했다. 한창 전성기라 할 수 있는 1970년대에 만해도 석전리 일대의 주택 임대료는 대단히 높았다. 미군들을 상대로 방 2개에 화장실이 딸린 주택은 대략 한 달에 3~5만원 정도를 받고 미군들에게 세를 놓았다. 한국인에게 세를 놓을 때 받는 임대료의 5배 정도였다. 많게는 10배 정도를 받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고액의 임대료는 자연스럽게 주택가격의 상승으로 이어졌고 석전리 일원의 주택 신축 붐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러한 고가의 주택 임대료는 현재도 유지되고 있다. 면적이 100㎡인 아파트의 한 달 임대료가 대략 30만 원 정도이지만 미군들은 100만원 내외를 준다. 미군들은 임대료 가격에 상관하지 않는다. 아마 영외 거주자의 경우 임대차 계약서만 제시하면 금액에 상관없이 지원해주는 혜택 때문일 것이다. 많은 주민들이 미군 부대에 취업할 수 있어 경제적 안정을 이룬 사람들이 새로운 소비 계층으로 등장해 지역 경제 활성화를 주도했다. 이러한 변화로 한적한 농촌 지역이던 왜관에 캠프 캐롤이 주둔하면서 거리는 내국인과 외국인이 뒤섞인 인파의 물결로 넘쳐나고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물자와 음식물로 한결 풍요로운 지역으로 변화해 갔다. 또한 경제적으로 풍족한 미군 병사들과 미군 부대 종사자들의 높은 소비성향으로 지역경제는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이들을 대상으로 한 각종 식당과 생필품점, 잡화점등이 속속 들어서고 거리는 일시에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시장에는 없는 물건이 없는 만물상과 같은 존재로 부각되어 인근 지역의 주민들도 불러들이는 시너지 효과를 발휘했다.

[부대찌개의 시작은?]

인간이 가장 참기 어려운 고통은 무엇일까.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그러나 가장 어려운 고통은 배고픔일 것이다. 우리 속담에 ‘3일 굶으면 남의 집 담장을 넘는다.’는 속담이 있다. 그만큼 배 고품은 견디기 어렵다는 말일 것이다. 『난중잡록(亂中雜錄)』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을 지낸 조경남(趙慶男)이 지은 것이다. 그중의 한 대목을 현대에 와서 소설가 김훈이 『칼의 노래』라는 소설에 인용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명나라 군사들이 술 취해서 먹은 것을 토하면 주린 백성들이 달려들어 머리를 틀어박고 빨아먹었다. 힘이 없는 자는 달려들지 못하고 뒷전에서 울었다.” 오늘날처럼 풍요로운 시대를 사는 우리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대목이다. 우리의 입으로 거론하기에는 참으로 부끄러운 역사다.

5·16혁명 이후 경제개발 5개년계획과 새마을운동이 성공적으로 추진되면서 경제적 여건이 나아지기 이전까지 대부분의 서민들은 언제나 먹을거리를 확보하는 것이 최대의 과제였다. 특히 농촌 지역의 어머니들은 항상 어린 자식들의 주린 배를 보고 가슴 아파 했다. 이것은 칠곡군 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물론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과 같은 전란의 시기보단 덜했지만 배고픔은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시절에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식품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음식이었다. 주로 미군 부대 식당 종사자를 통하여 흘러나오는 음식물들은 가뭄 속의 단비와 같은 존재였다. 주로 빵과 소시지, 베이컨, 햄, 스테이크 등이었다. 그동안 우리들이 1년에 한두 번 구경할까 말까한 고기가 주종이었다. 그때까지 생고기 몇 점을 넣고 국을 끓여 먹던 현실과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부대 밖으로 흘러나온 음식물들은 일반 가정에서 구하기 쉬운 재료들과 합쳐져 허기진 배를 채웠다. 햄과 소시지, 스테이크 조각과 김치와 무시래기, 배추시래기를 넣고 고춧가루와 마늘등을 넣고 얼큰하게 끓여내면 고기 맛이 진한 새로운 음식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부대 종사자들에게서 흘러나오는 음식물들은 이웃에 나누어 먹었으나 찾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판매되기 시작했다. 전문적으로 요리해 손님들에게 판매하게 이르렀다. 이것이 부대찌개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부대찌개는 비단 캠프 캐롤이 주둔한 왜관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미군이 주둔했던 의정부나 동두천, 용산, 이태원 등 모든 지역에서 탄생한 새로운 음식 문화의 하나가 되었다. 이제는 ‘부대찌개’란 이름으로 완전히 자리 잡았고 많은 사람들이 찾는 음식이 되었다. 한국과 미국이 합쳐진 퓨전 음식인 부대찌개는 이제 전국에 수많은 가맹점을 음식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일본에 와있던 중국의 노동자와 학생들의 배고픔을 안타까워한 끝에 인근 화교 식당에서 버린 닭이나 돼지 뼈, 푸성귀 등을 모아서 만들어낸 음식이 짬뽕으로 발전한 것과 비슷하다 할 수 있다. 부대찌개와 짬뽕은 출생 비밀이 같은 샘이다.

[우리도 애국자]

캠프 캐롤을 이야기 하면서 후문(後門)의 이야기를 뺄 수는 없다. 후문 일대는 행정구역상 왜관읍 석전 2리다. 예전에 이곳에 산신당이 있었고 정성을 다해 기도를 드리면 만사가 성취된다는 이야기가 있어 ‘만취골(萬取谷)’로 불렸다. 1960년부터 캠프 캐롤이 주둔하면서 부대 후문 일대에 급속히 마을이 형성되면서 ‘후문’으로 불리고 있다. 후문 일대에 마을이 형성되고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함께 들어온 사람들은 다양하다. 미군 병사들이 가장 먼저 들어왔다. 주로 흑인과 백인으로 구성된 미군 병사들은 당시만 해도 신기한 구경거리였다. 후문을 중심으로 한 석전리 일대에는 미군 병사와 외지에서 직장을 따라 이주해온 부대 종사원, 지역 주민들이 한데 어우러진 국제도시를 방불케 했다. 미군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가게들은 하나둘 영어 간판을 달기 시작하자 한글 간판보다 영어 간판이 더 많은 한국 속의 미국에 온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다. 이들과 함께 젊은 아가씨들도 함께 들어 왔다. 아가씨들은 미군 전용 클럽에서 일하면서 미군 병사들에게 몸을 맡기고 생활했다. 당시 이들 아가씨들은 주로 위안부 혹은 양공주란 이름으로 불렸었다. 아가씨들은 클럽에서 일하면서 미군 병사들을 주로 상대 했으나 마음이 맞으면 인근에 방을 얻어 동거생활을 하기도 했다.

동거생활을 하던 아가씨들은 상대가 귀국하면 함께 미국으로 들어가 국제결혼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들로 인하여 형성된 생소한 문화를 흔히 기지촌 문화라고 부른다. 캠프 캐롤이 주둔한 왜관뿐이 아니라 미군이 주둔한 부대 주변에는 전국 어디나 기지촌 문화가 형성되었다. 이들은 주로 미군 부대가 있는 동두천, 의정부, 부산 등을 오가면서 생활했다. 미군 병사들이 가장 많았던 1970년대 전후에는 건강 검진을 위하여 검진 기관에 등록된 아가씨만 해도 5백 명이 넘었으니 미등록자까지 합하면 대략 1천여 명은 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당시만 해도 달러가 귀하던 시절이라 이들 아가씨들은 스스로 달러를 벌어들이는 애국자라고 말하기도 했다. 캠프 캐롤 후문은 어려운 시절을 보냈던 우리들의 아픈 단면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현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제는 나가주세요!]

한적한 농촌 지역이었던 왜관에 주둔한 캠프 캐롤은 우리에게 항상 긍정과 부정 두 가지 얼굴로 존재해 왔었다. 부대에서 흘러나온 음식물이 주린 배를 채워주고 지역 경제를 활성화 시킨 긍정의 얼굴을 갖고 있다면 기지촌 문화라는 부정의 얼굴도 갖고 있다. 주둔 초창기엔 부정보단 긍정적인 면이 더 많았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어려운 시절이라 주린 배를 채우고 일자리가 생긴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우리 경제의 성장과 함께 우리의 소득수준이 높아지고 인근 구미공단을 중심으로 많은 일자리가 생기면서 미군 부대에 대한 의존도는 점점 낮아졌다. 또한 도시 중심부 알짜배기 땅에 미군 부대가 주둔함으로써 도시 개발에 지장을 받자 점차적으로 이제는 철수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심심찮게 발생하는 미군 범죄도 철수 여론에 한 몫을 차지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여론 형성이 가시화되자 1996년 4월에 열린 칠곡군의회 제53회 임시회 군정질문에서는 미군 부대 이전 대책을 묻고 2년 뒤인 1998년 11월에는 군의회의 행정사무감사에서 ‘미군기지 땅찾기 운동’을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1999년 7월에 열린 군의회에서는 박창기 의원 외 6명의 의원이 발의한 미군 부대 이전 촉구 결의문이 채택되기도 했다. 군의회 의원들은 미군 부대 이전 촉구 결의문에서 “1959년 이래 칠곡군의 소재지인 왜관읍 중심부에 주둔하고 있는 캠프 캐롤 미군 부대는 국가안보적 차원에서 그 중요성은 공감하나·백만 평의 부지를 40년 동안 점유함으로써 지역의 균형 발전과 지역 정서에 많은 지장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지역 주민의 대표인 칠곡군의회 의원 일동은 미군 부대 이전을 촉구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

첫째, 당국은 도심지 미군 부대를 외각지로 이전하는 계획을 점진적으로 추진하여 도·농복합형 칠곡시의 기반 시설 부지를 확보해야 한다. (중략) 넷째, 미군 부대가 점유하고 있는 부지에 대해서는 부대 주둔으로 지역 발전과 군민들의 일상생활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고 있는 만큼 관계 당국에 피해 보상을 강력히 요구한다.“고 결의하고 행정자치부와 국회 등 전국의 84개 기관단체에 결의문을 발송했다. 이러한 부대 철수 여론에 힘입어 2002년에는 부산에 있던 미 국방부 물자 재활용 유통사업소가 고속철도 차량기지 건설로 이전이 불가피하게 되자 캠프 캐롤과 인접한 지천면 신리로 이전 계획이 추진되기도 했었다. 이에 따라 칠곡군과 칠곡군의회, 지역 주민들이 힘을 합쳐 강력한 반대운동을 펼쳐 이전 계획을 저지하기도 했다. 이후 미 국방부 물자 재활용 유통사업소는 인근 김천시의 모처로 이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 캠프캐롤 후문은?]

캠프 캐롤 후문의 상인들은 이제 미군 상대의 장사는 끝났다고 잘라 말한다. 그만큼 후문의 경기가 죽었다는 뜻이다. 10년 전만해도 흥청망청하던 분위기는 사라진지 오래다. 삼삼오오 짝을 이루어 거리를 누비는 흑백의 미군 병사들은 찾아보기 어렵다. 밤 9시만 되면 정적이 감돈다. 이렇게 후문의 경기가 급격히 쇠퇴한 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 무엇보다 미군의 숫자가 많이 줄었다. 여기에다 9·11테러 이후 미군 당국에서 미군 병사들의 안정을 위해 밤 9시 이후에는 부대 밖 외출을 금지시킨 것도 후문의 경기를 후퇴 시키는데 한몫을 했다. 여기에다 전국적으로 불어온 반미 감정도 원인으로 작용하고 부대 내에 다양한 복지시설을 계속 확충함으로써 부내 내에서도 일상생활에 큰 불편을 느끼지 않음으로써 자연스럽게 미군 병사들의 부대 밖 출입도 줄어들게 했다.

한때 밤거리를 환하게 밝히던 클럽들의 네온사인도 화려함을 잃고 간판만 덩그러니 내걸려 있고 핫팬츠 차림의 아가씨와 흑백의 미군 병사들이 흥청거리며 달러를 뿌려대던 진풍경은 이제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10여개에 이르던 미군 클럽들은 이제 절반 이상이 문을 닫았다. 손님도 미군 병사보다 한국인이 더 많다. 주로 식사를 위해 찾아오는 한국인이 대부분이다. 찾아오는 미군 병사들도 “미군 자체적으로 자정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여종업원들도 손님과 대화를 나누거나 포켓볼을 함께 칠 정도로 분위기가 예전과 완전히 변했다"며 "업주들도 말한다. 미군들의 영내 거주가 많아지면서 자연스레 셋방 임대업을 하던 주민들도 방이 텅텅 비면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그동안 캠프 캐롤을 상대해 생업을 꾸려 나가던 상인들은 "미군들이 줄어들면서 우리들의 삶의 터전도 줄어들고 있다. 그동안 그 사람들 덕분에 수십 년간 먹고 산 건 부인할 수 없지만 좋은 시절은 이제 다 지나갔다."면서 이제 새로운 길을 찾아보고 있다고 한다. 이렇듯 시대 변화에 따라 한때 국제도시를 방불케 했던 캠프 캐롤 후문의 화려함도 빛을 잃어가고 있다.

[우리는 좋은 친구]

캠프 캐롤왜관읍에 주둔한 지 반세기란 긴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미군과 지역 주민들은 때로 반목하고 불편한 관계를 유지한 적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해 왔었다고 할 수 있다. 서로가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고 협조하는 노력을 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캠프 캐롤과 지역 주민들이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잇는 것은 ‘한미친선협의회’ 구성이 큰 몫을 차지했다고 할 수 있다. 한미친선협의회는 1973년 7월 7일에 구성됐다. 설치 근거도 자치단체 조례로 명문화되어 있다. ‘칠곡군 한미친선협의회 설치조례’가 그 법적 근거다. 한미친선협의회는 칠곡군수와 캠프 캐롤 부대장이 공동으로 위원장을 맡아 수시로 개최한다. 협의회에서는 미군과 지역사회 간의 공동 관심사와 문제 발생 우려가 있는 사항에 대하여 협의하고 대책을 강구하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관계로 인하여 지역에서 일어나는 많은 사안에 대하여 양측은 수시로 협조하고 있다. 1993년에 왜관읍 봉계리 일원에서 발생한 대형 산불을 비롯해 지역에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재난 사고에는 미군들이 직접 참여해 복구 업을 함께 실시한다. 또한 부대의 군용 장비를 우선 지원하기도 한다. 특히 건물 화재 등의 긴급 사항에는 한미 양측의 소방대가 동시에 출동해 화재 진압 활동을 벌이기도 한다. 또한 매년 4월5일 식목일에 개최하는 나무 심기 행사에도 언제나 미군 병사들이 참여해 함께 지역의 산림을 가꾼다. 왜관읍 의용소방대원들은 캠프 캐롤 장병들과 협조해 왜관 주변의 환경 정화 활동을 벌여 깨끗한 환경 조성에도 일조를 하고 잇다. 의용소방대원들은 미군 병사들과 함께 환경 정화 활동을 하는 과정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서로의 문화를 익히는 계기가 된다고 한다.

최근 이러한 우호 관계는 어린 학생들에게로 확산되고 있다. 칠곡군 교육문화회관의 평생교육 프로그램과 연계해 지역의 학생들이 캠프 캐롤에 들어가 미군 장병들과 함께하는 영어캠프를 운영해 좋은 성과를 올리고 있다. 미군과 함께하는 영어 캠프는 좀처럼 원어민 교사를 접하기 어려운 지역 학생들의 영어 공부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2003년 미군 부대 후문 인근에 개교한 석전중학교는 미군과 지역 학생이 ‘윈-윈’하는 좋은 사례다. 미군 병사들이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교장선생님은 미군 병사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친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이 프로그램은 학교와 학부모 미군이 머리를 맞대고 찾아낸 프로그램이다. 캠프 캐롤 501여단 그래고리 중령은 “미군과 주민, 학생들 간의 장벽을 허무는 데는 이만큼 좋은 프로그램은 없다.”고 자랑한다.

한편 매년 7월에는 백발이 성성한 노병들이 특별한 행사를 연다. 6·25전쟁 휴전을 기념하여 6·25참전유공자회가 주축이 되어 미군 장병들을 초청하는 ‘한미친선의 밤’ 행사다. 외국에서 고생하는 미군 병사들을 격려하고 6·25전쟁에서 한국을 지켜준데 대한 감사의 표시다. 이러한 행사를 통하여 한미 양측은 6·25전쟁을 계기로 맺어진 혈맹의 관계는 아직도 이어가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4.03.04 내용 중 명칭 변경 칠곡군 교육문화복지회관->칠곡군 교육문화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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