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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301436
한자 -聖地
영어의미역 Holy Place in Sinnamugol Village
분야 종교/기독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터
지역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연화리 57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장영복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천주교 박해 때 순교성지
원건물 건립시기/일시 조선 후기/1833년연표보기
소재지 주소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연화리 57 신나무골지도보기
소유자 천주교 대구대교구

[정의]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연화리에 있는,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를 피해 모였던 신자촌.

[개설]

천주교 전례는 봉건적 유교 도덕과 사회규범에 대항하는 사상적 반항이자 이념적 도전이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기본 질서를 부인하는 천주교 신자들을 박해를 하였으며 이를 피해 모인 신자촌이다. 천주교 신자들이 처음으로 신나무골에 살기 시작한 것은 1815년 을해박해 당시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청송의 노래산, 진보의 머루산, 일월산 중의 우련발과 곧은정에 살던 신자들이 박해를 만나 200여 명이 체포된다. 많은 신자들이 배교(背敎)·석방되거나 옥사해 겨우 33명 만이 대구감영으로 이송된다. 이 때 체포된 신자들의 가족이나 다른 곳 신자들이 임진왜란 때의 피난지이기도 했던 신나무골로 숨어들어 신자촌이 형성되었다.

[변천]

대구를 지척에 둠으로써 많은 선교사들이 대구 진출 전초 기지로 삼았던 신나무골최양업, 다블뤼, 리텔 신부 등이 사목 활동을 했던 곳이다. 1831년 조선교구 창설 후, 1837년부터는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 샤스탕 신부가 신나무골과 언양 등지에 머물면서 한반도 남쪽 지역을 맡아서 전교를 하기 시작했다. 1839년 기해박해로 샤스탕 신부가 순교한 후에는 다블뤼 신부, 1849년부터 1861년 6월까지 12년간은 최양업 신부가 신나무골을 방문하여 성사를 집전하였다.

최양업 신부가 과로로 쓰러진 후에는 다시 다블뤼 신부가 신나무골 지역을 맡아 오다가 1866년 병인박해로 인하여 신나무골의 신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박해가 잦아들면서 신자들은 다시 신나무골로 모여들었고, 1882년부터는 영호남 지방 선교에 지대한 역할을 한 로베르[한국명 김보록] 신부가 순회 사목를 하기 시작했다. 1896년 한·불조약으로 신앙의 자유가 어느 정도 보장이 되면서 로베르 신부는 신나무골을 거점으로 삼아 활발한 선교 활동을 펼쳤다. 그 후 30여 년에 걸친 로베르 신부의 사목 활동은 지역 복음이 확고히 자리 잡는 데 거의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영남 지방의 복음화에 헌신했던 로베르 신부는 또한 교육 사업에도 큰 관심을 기울여 속칭 ‘연화서당’이라 불리는 신나무골 학당을 설립했다. 1833년 세워진 학당은 1920년 신동에 초등학교가 설립될 때까지 신학문과 구학문 그리고 천주교 교리도 함께 가르쳤다. 신나무골 학당은 1855년에 설립된 배른 신학교를 제외하고 1884년 서울에서 설립된 한한학교와 함께 천주교 내에서는 가장 일찍 신학문을 가르쳤던 신교육 기관이었다. 신나무골 성지는 1894년 가실 본당 소속의 공소였다가 1926년 왜관 본당에 소속되었고, 1968년에 신동 본당이 설립된 후에는 다시 신동 본당에 속하게 되었다.

[위치]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연화리 산 57번지에 있다. 경부고속도로 왜관 나들목에서 빠져 나오면 바로 국도 4호선과 연결되는데 우측으로 가면 왜관읍이고 좌측으로 가면 신동을 거쳐 대구로 간다. 대구 쪽으로 4㎞쯤 가면 길 오른쪽으로 경부선 연화역이 있고 경부고속도로 밑을 지나 1㎞ 남짓 거리 왼쪽에 위치하고 있다.

[발굴조사경위 및 결과]

1973년 성지 개발 기금을 모금하면서 시작된 신나무골 성역화는 1977년 제1차 사업을 완수하고 영남 지방의 천주교회 선교 요람 기념비를 세웠다. 1984년에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맞아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의 주선으로 이곳에서 살다가 한티로 피난가서 순교 당한 이선이[엘리사벳]의 묘소를 한티로부터 이장하였다. 그러나 이선이의 장남 배도령[스테파노]의 묘는 찾지 못했다. 대구 지역 본당의 첫 본당 터를 복원하여 로베르 신부 당시의 사제관과 신나무골 학당, 전시관을 복원했으며, 로베르 신부의 흉상을 건립했다.

[현황]

신나무골에는 사제관, 로베르 신부 흉상, 명상의 집, 신나무골 학당, 순교자 이선이[엘리사벳]의 묘가 있다. 사제관은 로베르 신부가 대구 교구 첫 본당 신부로 발령 받고 이곳에서 거처하였고, 지금은 신나무골 성지와 관련된 자료들의 전시실로 사용되고 있다. 로베르 신부 흉상은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로서 1877년 한국에 입국하여 전교 활동을 하며 신학생을 모아 가르치던 한국명 김보록인 로베르 신부를 기리기 위한 흉상이다. 명상의 집은 신나무골에서 피정을 원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된 장소로서 20~25명 정도의 인원이 숙박을 할 수 있다. 신나무골 학당은 현재 소성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순교자 이선이[엘리사벳]의 묘는 1860년 경신박해 때 신나무골에서 한티로 피신을 갔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아들 배도령[스테파노]과 함께 순교한 이선이의 묘이다. 1984년 한국 천주교회 창립 200주년 행사 때 한티에서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의의와 평가]

사적지의 보존으로 사제관, 명상의 집, 신나무골 학당 등을 복원하여 신자들의 재교육의 장이 되고, 순례객들이 기도하고 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성지로 완공되었다. 연중 천주교 신자들이 순례 행사로 순교 정신을 기리고 있다.

[참고문헌]
  • 주평국, 『하늘에서 땅끝까지』-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가톨릭출판사, 1996)
  • 천주교 대구대교구(http://www.pax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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