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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동장씨가 마을에 자리 잡고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3E020101
분야 지리
지역 경상북도 칠곡군 기산면 각산1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순하

인동장씨는 지금으로부터 약 300여 년 전 여헌 장현광(張顯光) 선생의 증손 4형제, 곧 만중(萬重)을 비롯한 만취, 만익, 만성이 인동 남산에서 양촌(陽忖)으로 옮겨 살다가 각산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마을 주민 장세완 씨에 따르면, 장세완 씨의 11대조인 소매당 장벽의 묘소를 시작으로 1700년대부터 마을에 인동장씨가 거주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인동장씨가 각산1리에 거주하게 된 데에 대해 장세완 씨는 다음과 같은 추측을 내놓았다.

“양촌카는 여기서(각산1리) 조금 삼사백매다(미터) 떨어져서…… 11대 조부 형제분들(소매당 장벽 형제)이 진외가를 왔다갔다하시면서 이 골짜기를 보고 동네가 참 길지로 보인다고 생각하셨을 꺼다. 그러니깐 그 외할배(소매당 장벽)가 돌아가시면서 산소를 대흥사에다가 섰는 거죠.”

장세완 씨의 13대 조부 여헌 장현광(張顯光)이 양촌(陽忖)에 살 당시 각산1리는 진외가가 있는 성주로 가는 길목에 있었다. 소매당 장벽의 형제가 진외가인 성주로 오고가면서 반달형으로 생긴 각산1리가 남향이라 따뜻하고 온화해 보여 동네를 조기(肇基, 동네에서 처음 살기 시작함)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이는 풍수지리와도 연관이 되는데, 즉 소매당 장벽의 묘소가 대흥사 절 바로 위에 위치하게 되면서 큰아들은 인동의 종가에, 둘째 아들과 셋째 아들은 시묘살이로 묏자리 근처에 터를 잡게 되면서 각산1리에 세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집안사람들 사이에서는 역사적인 사건의 소용돌이에 말려들면서 각산1리를 택했을 것이라는 추측과, 인동 지역에 전염병이 확산되어 각산1리에 세거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전해 온단다.

특이하게도 인동장씨 문중에서는 예부터 ‘파(波)’라는 용어를 잘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각산1리에 거주하고 있는 인동장씨는 남산파와 황상파이나, ‘파(波)’라는 용어 대신 ‘집’으로 구분했다고 한다. 즉 남산파는 남산집, 황상파는 황상집으로 불렸는데, 이는 촌수가 구분되어 멀고 가까움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각산마을에 안마와 바깥마의 구분이 생긴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라고 한다.

2009년 현재 각산1리에 거주하는 황상파는 30호, 남산파는 20호 가량 된다고 한다.

[정보제공]

  • •  장세완(남, 1951년생, 각산1리 거주)
  • •  장도상(남, 각산1리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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