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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리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300225
한자 八里縣
영어음역 Paly-hyeon
영어의미역 Paly-hyeon Local Administration District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지역 경상북도 칠곡군|대구광역시 북구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집필자 임삼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정연도/일시 757년연표보기
시행연도/일시 757년
폐지연도/일시 940년연표보기

[정의]

통일신라시대에 칠곡 지역에 있었던 지방 행정제도.

[개설]

팔리현경상북도 왜관읍·지천면·동명면·가산면 일대와 대구광역시 북구 칠곡 일대에 있었던 남북국시대 신라의 지방 행정구역 명칭이다. 팔리현의 원래 명칭은 팔거리현[북치장리(北恥長里) 혹은 인리(仁里)라고 불리기도 함]이었으나, 통일신라시대에 팔리현으로 변경되었다. 또한 당시 수창군(壽昌郡)[현재 대구광역시 수성구]의 영현이 되었다. 757년 이후부터 계속 팔리현으로 불리다가, 고려 태조팔리현에서 팔거현(八居縣)으로 변경되었다.

[관련기록]

『삼국사기』권34 잡지3 지리1 신라에서는 “수창군은 본래 위화군[火郡]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수성군(壽城郡)이다. 영현이 넷이었다.··· 팔리현(八里縣)은 본래 팔거리현(八居里縣) 또는 북치장리(北長里) 또는 인리(仁里)라고도 하였다.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라고 되어 있다.

『삼국사절요』 본기(本紀) 정유년(丁酉年, 757)에서는 “수창군은 일본에는 수(壽)를 가(嘉)라고 하였다. 본래 위화군[火郡]이요, 『고려사』에는 상촌창군(上村昌郡)이라 하였다. 영현(領縣)은 넷이니, 대구현(大丘縣)은 본래 달구화현(達句火縣)이요, 팔리현(八里縣)은 본래 팔거리현(八居里縣)이며, 1본에는 북치장리(北長里)라 하였고 1본에는 인리(仁里)라 하였다”고 되어 있다.

『증보문헌비고』권17 여지고 5 군현 연혁 3 경상도에서는 “중종(中宗) 14년(1519)에 본도(本道)의 일이 번다(煩多)하다 하여 좌도 감사(左道監司)와 우도 감사(右道監司)로 나누어, 낙동강(洛東江) 이동을 좌도(左道)에 속하게 하고, 그 이서를 우도(右道)에 속하게 하였으나 동년(同年)에 폐단이 많으므로 파(罷)하고 1도(道)로 삼았다. 선조(宣祖) 25년(1592)에 왜구(倭寇)가 쳐들어와 도로가 통하지 아니하므로, 다시 좌감사(左監司)·우감사(右監司)로 나누어 좌감영(左監營)은 경주(慶州)에 설치하고, 우감영(右監營)은 상주(尙州)에 설치하여 병사(兵使)·수사(水使)를 절제(節制)하다가, 선조 26년(1593)에 다시 합하여 하나로 하고, 감영(監營)을 성주(星州) 팔거현(八莒縣)에 두었으니, 곧 명(明)나라 총병(摠兵) 유정(劉綎)이 주둔하던 곳이다”라고 되어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 경상도 상주목에서는 “팔거현(八莒縣)은 본디 팔거리현(八居里縣)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팔리(八里)로 고쳐서 화원(花園)과 함께 모두 수창군(壽昌郡)의 영현(領縣)을 삼았고, 고려에서 팔거(八居)로 고쳤다. 별호(別號)는 칠곡(七谷)이다. 그 뒤에 거(居)의 음(音)이 바뀌어서 거(莒)가 되었다. 위의 세 현(縣)은 현종 무오년에 모두 경산부(京山府) 임내(任內)에 붙였다”라고 되어 있다.

[변천]

팔리현은 통일신라시대 757년(경덕왕 16) 행정구역 개편으로 생겨난 명칭이다. 원래의 명칭은 팔거리현(八居里縣)이었다. 팔리현은 하빈현(河濱縣)·화원현(花園縣)·대구현(大丘縣)과 함께 수창군의 영현이었다. 고려 태조(太祖) 때 다시 팔거현(八居縣)으로 고치면서 사라졌다.

[현황]

현재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지천면·동명면·가산면 일부와 대구광역시 북구 칠곡 일대에 해당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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