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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300341
한자 金烏山城
영어음역 Geumosanseong
영어의미역 Geumosanseong Fortress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경상북도 칠곡군 북삼읍 숭오리 산31-2외 2필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이희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1986년 12월 11일연표보기 - 금오산성 경상북도 기념물 제67-2호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금오산성 경상북도 기념물 재지정
성격 산성
양식 석축 산성
건립시기/연도 고려 말기
관련인물 정기용|이수일
높이 외성 2,4m|내성 2m
총길이 6.2㎞
둘레 외성 3.5㎞|내성 2.7㎞
면적 346,404㎡
소재지 주소 경상북도 칠곡군 북삼읍 숭오리 산31-2 외 2필지도보기
소유자 국유
문화재 지정번호 경상북도 기념물

[정의]

경상북도 구미시와 김천시, 칠곡군 북삼읍 숭오리에 걸쳐있는 금오산에 세워진 고려 말기의 산성.

[개설]

경상북도 구미시에 있는 해발 976m의 험준한 금오산의 정상부와 계곡을 감싸 내·외성 2중으로 돌로 쌓아 만든 산성이다. 내성은 정상부에 테를 두른 모양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10리나 되며, 험한 절벽에는 따로 성벽을 쌓지 않았다. 외성은 계곡을 감쌌는데 둘레가 5리나 되며, 내·외성벽의 길이는 6.3㎞나 된다.

처음 금오산성을 쌓은 연대가 문헌상에 나타나 있지 않아 불확실하지만 고려 말 왜구들이 내륙 깊숙이까지 빈번히 쳐들어와 인명을 살상하고 노략질을 하여 이를 피하기 위해 인근 주민들이 천혜의 요새인 금오산에 피난, 왜구들의 침략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하여 산성을 쌓아 군병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고 추정된다.

[건립경위]

조선 중종(中宗)조의 기록에 의하면 금오산은 고려 때에는 남숭산이라 불리었고, 선산부의 남쪽 43리에 위치하여 서쪽은 개령, 동쪽은 인동, 북쪽은 부(府)의 경계에 있다고 하였다. 금오산성은 석축의 둘레가 7,644자[尺], 높이가 7자이고, 그 절반 이상이 암벽으로 이루어져 몹시 험준하고 고려 말에 선산, 개령, 인동, 성주 등의 많은 백성들이 왜구를 피하여 이곳에 들어와 살았으며 군사를 징발하여 이를 수비했다고 하니 고려 말에 축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당시에는 군창(軍倉)이 있었던 사실도 알 수가 있다.

조선조 『태종실록(太宗實錄)』권19 1410년(태종 10) 3월 병인(丙寅)에 수축(修築)이라 기록된 점과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志)』선산부조(善山府條)에 “金烏山城 善山 府及 開寧 仁同弁 石築 始築年月未詳 永樂癸巳 太宗 十三年 改築 周 8025尺 7寸 高 7尺 三軍倉 三池二泉 冬夏不渴”이라 한 것으로 보아 이때까지 고려시대의 성터가 상당 부분 잔존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180여 년간 문헌상에 나타난 기록이 없어 수개축(修改築)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사실상 산성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상태에서 임진왜란을 맞게 되었고 임진왜란이 일어난 4년 뒤인 1595년(선조 28) 8월 비변사(備邊司)에서 상계(上啓)하기를 금오산성과 인동의 천생산성을 수축하여 대진(大鎭)을 만들 것과 이 중책을 선산부사 배설(裵楔)로 하여금 전담토록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의견을 물어서 처리함이 옳다고 진언(進言)하였다.

이 무렵의 기록으로 보아 금오산성의 수축은 당시 선산부사 배설에 의하여 완성된 듯하며, 승병대장 유정도 금오산성 수축에 조력(助力)하여 국난에 크게 공헌한 것을 알 수 있다. 배설은 산성을 수축하고 성내 진중에 아홉 개의 샘과 일곱 개의 못을 팠다. 이는 대혜폭포 아래 도선굴로 가는 길목 바위에 "善山府使 裵楔 築 金烏山城 穿 九井七澤(선산부사 배설 축 금오산성 천 구정칠택)" 이라고 각자한 글귀에서 확인 할 수 있다.

금오산성은 전란 중 영남의 요충지로서 중요한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했으며 1596년(선조 29) 11월 초 우의정 이원익이 강원, 충청, 경상도체찰사로 부임할 즈음에 성주 영중(營中)으로 내려가 금오산성을 수비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그러다가 동년 11월 16일 도원수 권율의 왜적 방어책에 관한 장계(狀啓)에 따라 비변사는 왕에게 진언하게 되었으니 금오, 천생 두 산성은 동서로 낙동강의 험(險)을 끼고 있어 중로(中路)의 요충이므로 반드시 수호할 요지임을 강조하고, 경주의 부산성, 삼가의 악견산성과 함께 장수를 골라 굳이 지킬 것과 이미 축성된 대구의 공산성, 성주의 용기산성에는 인근 백성을 입보(入保)시키고, 창령의 화왕산성과 같은 요지는 급히 수축하여 긴급 사태에 대비토록 해야 한다고 주청하여 재가를 받았다.

그리하여 그 다음날 11월 17일 도체찰사 이원익이 출발할 때 왕이 영남의 산성에 대하여 하문한 바 이원익은 성주산성은 수축한다 하더라도 형세와 계곡이 좋지 못하여 군사가 주둔하기에 불편하므로 선산 금오산성을 선산부사 배설로 하여금 수비케 할 것을 상주하였다. 왕은 다시 금오산성에 물이 없음을 걱정하니 이원익은 물은 우물을 파면 얻을 수 있으며 성안에는 육지와 평야가 상망(相望)하고, 민호(民戶)도 조밀하여 왜적 방비에 극히 좋은 조건임을 역설하였다. 연후에 임지로 떠난 이원익은 영남, 호남 여러 곳을 전전하면서 견벽청야(堅壁淸野)와 거험적축(據險積蓄)의 방어책을 점검 지휘하였다. 그리하여 1596년 겨울부터 금오산성의 수축(修築)이 시작되었다.

1597년(선조 30) 1월,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청야대변(淸野待變)의 산성 고수작전을 중시하고, 삼남의 모든 산성을 굳게 지키게 하였다. 이때 이원익금오산성으로 들어가 이곳을 전략본영으로 삼았다. 그러나 정유년 9월 왜적이 금오산성에 침공하여 성 내부가 상당히 파괴된 것으로 짐작되고, 그 이래로 10년간 방치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1606년(선조 39) 3월에 또다시 대대적인 수축이 단행되었다.

4월부터 빈집을 다 없애고, 불탄 흔적을 치우고, 흩어진 기와를 모아서 객사, 무기고, 사창, 심지어 승군들이 묵을 승실까지도 5, 6개월간 공사하여 갖추었다. 묻힌 연못도 수리하고, 샘물도 다시 찾았으며 동원된 인원이 3,400명, 성터는 2,361보(步)였다고 한다. 그밖에도 문루(門樓, 西門), 포루(砲樓, 南峯), 무기를 제조하는 대장간까지 갖추었으며 성벽까지 보수를 끝내는데 약 1년 가까이 소요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안 가장 높은 곳에 보봉사(普峰寺)가 있었고, 진남사(鎭南寺)는 52칸인데 1606년(선조 39) 4월 29일에 화주(化主) 태순(泰淳)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축성에는 승군과 8개 현의 군인 2,731명이 동원되었고, 총 길이 1,730보(步)나 되었다. 그 후 30년 간 금오산성에 대한 상황은 잠잠하였다.

후에 민족 사상 최대의 치욕인 병자호란을 당하자 또다시 국방상의 요충으로 주목을 끌게 되었다. 이미 호란 이전부터 군제의 개편, 수도 피란처인 남한산성의 수축 등의 국방 대책이 추진되어 왔으며 호란 이후는 청(淸)과의 강화조약이 있었음에도 왜구 대비의 구실 아래 주요 산성의 수축은 은밀히 진행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639년(인조 17) 7월에는 경상감사 이명웅이 왕의 윤허를 받아 선산부사 이각으로 하여금 산성을 수축하도록 하였다. 이때 수축된 금오산성의 규모는 내성의 석축 둘레가 7,644자, 높이가 7자, 무성절벽(無城絶壁)이 661보(步)이며 성안에 7개의 못, 1개의 계수(溪水), 8개의 우물이 있다고 하였으니 내성은 국초에 수축된 규모와 동일하나 4개의 못과 8개의 우물이 증설되었다.

외성은 둘레가 4,135자 높이가 14자로 이 외성이 인조 17년에 가축(加築)된 것이며 속읍은 개령, 금산, 지례의 세 읍으로서 각기 군량과 병기를 비축하고 있어 춘추로 합동 훈련이 이 곳에서 실시되었다. 이로 보아 국초에는 내성만 존재했고, 이들의 외성은 1639년에 비로소 가축된 것으로 보인다.

그후 영조 대에 이르러 국방 시책이 다시 거론되어 축성, 해방(海防), 병제, 군기 등의 개선과 정비에 주력하였다. 이러한 시책의 일환으로 1735년(영조 11) 선산부는 우병사영(右兵使營) 관하의 독진(獨鎭)으로 승격되고, 선산도호부사는 무3품으로서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 금오산성 별장(別將)을 겸하게 되었으며 진보(鎭堡)의 사속(史屬)으로 진사(鎭史) 5명, 지인(知印) 5명, 사령(使令) 10명이 배치되었다. 당시 금오산성진(金烏山城鎭)의 병력은 3,500여 명이었다. 위와 같이 거진(巨鎭)으로 체제를 갖춘 금오산성은 대혜창과 내성창이라는 창고와 군기고가 있었고, 이 대혜창에는 쌀이 2,561석, 조가 1,608석, 피가 약 497석 정도 보관 되어 있었다다.

정조 대에도 국방의 요새로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1778년(정조 2)에는 사직(司直) 윤만동이 영남의 산성과 함께 금오산성의 중요성을 소론(疏論)한 바가 있고, 1787년(정조 11) 9월에는 삼남 암행어사 김복성의 암행복명시에 왕이 금오산성의 송금상황(松禁狀況)을 하문한 기록도 보인다.

김복성의 답을 보면 금오산성의 산림보호는 잘 되고 있으나 개령현민의 무소(誣訴)로 보호 경계가 축소되어 진민(鎭民)의 원성이 크다고 보고함에 그해 10월 대신들과 비국(備局)의 당상관을 소견(召見)한 자리에서 영의정 김치인금오산성은 국방상의 요충이므로 산림보호를 엄중히 해야 할 터인데 송금(松禁)한 계를 축정(縮定)하여 진졸(鎭卒)로 하여금 금양(禁養)을 하지 못하게 한 것은 반드시 곡절이 있을 것이니 도신(道臣)의 순찰시에 형편을 살펴 선처하도록 분부 할 것을 주청하여 왕은 이를 재가한 것이다.

이와 같이 국방의 관액(關厄)으로서 끊임없이 관심이 기울어져 그 기능이 계속되던 금오산성순조 이후 진관체제(鎭管體制)의 해이와 더불어 그 가치가 쇠퇴하기는 했으나 산성의 군액 기록으로 미루어 조선 말까지는 그 기능이 존속했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

[위치]

금오산성은 구미의 남서쪽에 있는 해발 976m의 금오산을 경계로 구미시와 김천시, 칠곡군에 걸쳐 있다.

[형태]

금오산성은 산의 정상부를 테뫼형으로 두른 내성과 정상부 서북쪽으로 향해 흐르는 큰 계곡을 끼고 포곡식으로 쌓은 외성의 이중 구조로 되어 있다. 성벽은 높고 험한 천연의 암벽을 이용하여 공력(工力)을 줄였다. 내성(內城)은 산의 윗 부분에 둘레가 10리나 되도록 쌓았는데, 절벽이 험한 곳은 천연의 성벽을 이루고 있으므로 따로 쌓지 않았다. 외성(外城)은 계곡을 감싸고 있는데 둘레가 5리나 되며 내·외 성벽의 길이는 6.3㎞ 정도 된다. 성벽이 붕괴된 곳도 있으나 비교적 잘 남아 있는 편이다. 내·외성이 내탁외협축(內托外夾築)이고 안쪽에는 배수를 위한 성 아래 못인 황(隍, 해자와 같음)이 마련되어 있다.

북쪽 외성에는 붕괴를 방지하기 위해 계단식의 높은 기단이 구축되어 있다. 정상에서 동서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에는 길이 약 450m, 폭 8~18m 되는 돌출 성곽이 있고, 북쪽 외성 끝 부분에도 짧은 돌출 성곽이 있다. 외성의 둘레는 약 3.5㎞이고 내성에는 남문·서문과 북쪽의 외성으로 통하는 중문이 있으며, 남서쪽의 산능선으로 따로 철성(凸城)을 452m나 축조하여 방어력을 높였다.

남문은 개구(開口)된 너비가 1.8m, 서문은 1.7m, 중문은 2m로 비교적 규모가 작으나, 바깥으로 문의 좌우에 성돈(城墩)처럼 보강된 모양을 보여주고 있다. 외성에는 북문에 해당되는 계곡 쪽의 출입문과, 그 반대편에 암문이 있다. 본래 외성의 출입문에는 6칸의 문루가 있었으나 지금은 너비가 1.2m, 높이 1.1m로서 특이한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성벽 위의 여장(女墻)은 너비 1.3m 규모였고, 여장에는 사혈(射穴)이 25×35㎝ 크기로 바깥쪽을 향해 경사지게 뚫려 있다. 규모는 외성이 길이 약 3,500m, 내성이 2,700m이며 높이는 지세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북문 근방은 약 3m, 험준한 절벽은 1m 정도이다.

[현황]

산성의 총둘레는 약 6,200m에 이르며 현재 남문, 서문, 중문, 암문 및 건물터가 남아 있다. 금오산 도립공원 내에 있는 부분은 거의 파손되어 있으나 기초 부분과 축성 흔적이 일부 남아 있다. 축성시 사용했던 자연석은 지형 탓으로 표토에 일부분 약 20㎝~30㎝ 정도 불규칙적으로 흩어져 있는 상태이며 산성 종단은 대체적으로 급경사를 형성하고 산성 내측(서북측)은 대체적으로 완경사를 이루고 있다.

산성 안에는 폭포가 있는 계곡과 연못, 우물이 많았고 각종 건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모두 폐허가 되었다. 이곳에 내성창(內城倉), 대혜창(大惠倉) 등의 창고와 진남사(鎭南寺)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현재 부근에는 도선굴(道詵窟), 금오서원(金烏書院), 길재사(吉再祠) 등이 있었다.

성 안에 남아있는 금오산성중수송공비(金烏山城重修頌功碑)는 장방형의 비석받침에 팔작지붕형의 비개(碑蓋)를 갖추고 있고 크기는 150㎝×62㎝×26㎝로 비신의 앞뒤에 모두 23행 643자가 새겨져 있으며, 글씨는 제액만 전서로 하고 나머지는 행서(行書)로 되어 있다. 이 비석이 세워진 정확한 연대는 확인 할 수 없으나 내용상 1868년(고종 5) 이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비석의 내용은 “고종 5년에 승지(承旨) 이용직(李容直)이 성에 올라 그 성의 허물어진 상황을 대원군에게 보고 하였고, 이에 대원군이 수축을 명하였고, 백성들도 감동하여 수축에 참여하였으며, 그 결과 성의 길이가 3,370보이고 누각이 모두 100여 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 비석은 “통정대부전행공조참의(通政大夫前行工曹參議) 박문현(朴文鉉)이 찬하고 조봉대부전주서(朝奉大夫前注書) 이능화(李能華)가 썼다"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추측컨대 현재 남아 있는 금오산성의 모습은 이때 중수(重修)된 후의 모습이라 하겠다.

[의의와 평가]

고려 말에 축성된 산성으로 구미 천생산성, 성주 독용산성, 칠곡 가산산성과 더불어 영남 지방을 관장하였던 중요한 산성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며 왜군의 공격을 방비하여 경상도 일대를 수비하였다. 현재는 금오산 도립공원 내에 있어 많은 탐방객들이 찾아들고 있으며 남문과 성벽, 성내에는 각종 산성 관련 유적들이 잘 남아 있다. 따라서 호국의 역사현장으로 잘 보존 관리되어 산 교육의 장으로 널리 활용되어야 할 것이다. 1986년 12월 11일 경상북도 기념물 제67-2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북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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