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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문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300975
한자 鄭在文
영어음역 Jeong Jaemun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신리|왜관읍
시대 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상공인
출신지 경상북도 달성군 하빈면
성별
생년 1876년연표보기
몰년 1954년연표보기
대표경력 남일상점 사장

[정의]

일제강점기 칠곡 지역에서 활동한 대표적 상공인.

[개설]

정재문(鄭在文)왜관 도선장 근처에서 정미업과 곡물거래를 주로 하는 종합상사 남일상점을 경영하면서 많은 부를 축적하였다. 16세 때 ‘안드레아’라는 세례명을 받을 정도로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정재문은 그동안 축적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왜관성당 건립 등 지역의 천주교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한 인물이다.

[활동사항]

정재문은 칠곡 지역의 천주교 발전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인물이다. 1892년 하빈[현재 달성군 하빈면]에서 안드레아라는 세례명을 받아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1906년에 지금의 칠곡군 지천면 신리로 이주하여 정미업에 종사했다. 그때 공소(公所)를 설치하여 13년간 활동하였다. 그 후 왜관으로 거처를 옮겨 처음에는 신자 김치견의 집을 공소로 사용하다가, 1923년에 정재문의 집으로 공소를 옮기면서 정식 공소로 인정되었다. 공소의 초대 회장직을 맡은 정재문은 1927년 구(舊) 성당이 위치한 언덕에 성당 신축 부지로 1,700여 평의 땅을 자비로 사들였고 공사비 34,800원 중에 22,800원을 자신이 부담하였다. 그리고 성당의 종(鐘)도 봉헌했으며, 차남이 성당 건축 공사 현장감독 역할까지 맡아 공사를 진행하였다.

정재문이 이러한 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은 튼실한 경제적 기반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 었다. 지천면에서 왜관으로 옮긴 후에도 계속 정미업에 종사하였다. 당시 왜관은 남쪽에서 올라온 해산물과 북쪽에서 내려온 영남 내륙지역의 농산물 교역장으로서 중계무역이 매우 발달하여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 초기부터 이와 관련된 사업들이 성행하였다. 도선장 근처에 있던 정재문의 남일상점[정미업과 곡물거래 종합상사]은 왜관으로 건너온 벼를 도정(搗精)하였으므로 인근에서 모여든 곡상(穀商)들에 의해 활발히 거래됐다. 이런 유리한 입지 조건과 사업 수완으로 사업이 크게 번창해 남일상점은 왜관 정미업계를 대표하게 되었으며 정재문은 지역에 손꼽히는 부호로 성장하였다. 일제의 수탈이 자행되던 1930년대에도 남일상점은 고무 롤러를 이용하여 하루에 많을 때는 50~60여 명이 도정작업을 하여 한 화차 분을 반출할 규모로 성장했다. 1954년에 사망하였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1.05.19 내용 수정 신도 -> 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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