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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암 서당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301370
한자 嘯巖書堂
영어의미역 Soam Village School
이칭/별칭 소암 서원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경상북도 칠곡군 기산면 평복리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김태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서당|서원
양식 소로수장
건립시기/일시 1703년[창건]연표보기|1932년[중건]연표보기
정면칸수 4칸
측면칸수 1칸 반
소재지 주소 경상북도 칠곡군 기산면 평복1리[가림이]지도보기

[정의]

경상북도 칠곡군 기산면 평복리에 있는 서원.

[개설]

소암 서원투암(投巖) 채몽연(蔡夢硯)[1561~1638], 백포(栢浦) 채무(蔡楙)[1588~1670], 극명당(克明堂) 장내범(張乃範)[1563~1640]을 향사하던 서원이다. 숙종 29년(1703) 10월 유학자인 장벽, 장세휘, 박정석 등 20여명이 소암동 팜암바위 뒷산에 사당과 강당을 지어 소암사라 하고 같은 해 38년(1712) 11월 2일 투암, 백포 부자를 봉안하였다. 순조 3년(1803)에 서원으로 승격하고 헌종 13년(1847)에는 극명당을 배향하였다.

[위치]

행정 구역 상 칠곡군 기산면 평복리에 해당된다. 평복1리 가림이 마을에서 남서쪽 봉산리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약 500m 가면 우측으로 몇 채의 민가 뒤 산록에 위치한다.

[형태]

경사진 산록을 평평하게 정지하고 방형으로 토석담과 시멘트 블록담을 두르고 일자형의 강당을 남향으로 앉혔다. 강당 정면에는 팔작지붕의 단칸 4주문이 있고 좌측 담 복판에는 별도의 지붕 없는 철재문을 두어 차량의 진입이 용이하게 했다. 강당의 규모는 정면 4칸, 측면 1.5칸이다.

진입은 정면의 높은 계단을 올라 대문을 지나면 건물기단 정면의 계단을 통해 대청으로 진입하는 정면 진입 구성이다.

평면 구성은 중앙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1칸씩 온돌방을 들이고 방 전면으로 퇴칸을 둔 전퇴 중당협실형이다. 방 뒤로는 벽장을 두어 수장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벽장은 상하부로 구분되어 있고 모두 쌍여닫이문을 달았다. 방 측면으로는 쪽마루를 두어 툇마루와 연결되는 동선의 편의를 강구했는데 좌측면은 탈락되었다. 방 전면에는 높은 문인방 위에 쌍여닫이 띠살창을 각각 두고 환기와 조명을 고려했다. 청방간에는 좌우가 다른 문을 설치했는데 좌측에 4분합들어열개명장지문을 달아 공간확장을 고려한 반면 우측은 쌍여닫이 띠살문으로만 처리했다. 대청 후면에는 높은 문인방을 들이고 각 칸에 쌍여닫이 바라지창을 설치했으며, 뒤로 쪽마루를 설치했다. 툇마루와 방 측면 쪽마루 사이에도 판벽에 높은 인방을 들여 외여닫이 당판창을 설치했다.

구조는 두 단의 견치석을 쌓은 기단 위에 원형으로 가공한 주초를 앉히고 전면과 대청 후면 중앙부에만 두리기둥을 세우고 나머지는 방형기둥을 세워 상부 구조를 받고 있다. 전면의 주상부는 보아지와 주두로 결구하고 주간의 창방과 장혀 사이에는 소로를 끼워 넣은 소로수장집이다. 보아지는 외단을 직절하고 밑면을 곡선으로 처리했으며 내단은 연화두 모양으로 조각했다. 굵은 대들보 위는 파련대공을 간략히 처리한 판대공을 세워 종도리부를 받치고 있다. 특히 종도리 아래에는 장혀와 별창방을 두고 그 사이에 소로를 끼워 넣었는데 이는 3량가로 처리함으로써 모자란 지붕 물매를 보충하기위해 설치한 것이다. 모서리 서까래는 선자연 형태이고, 지붕은 홑처마에 팔작지붕으로 처리했다.

[현황]

1871년 고종 때 서원 철폐령에 의하여 모두 훼철되었으나 1932년 3월 4칸의 강당을 복원하여 소암 서당이라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강당 대청 상부에는 기문 등이 남아있다. 남향한 강당을 중심으로 둘레에는 방형으로 토석담과 시멘트 블록담이 둘러쳐져 있고 정면에 대문, 좌측면에 철재문이 있다. 강당 뒤로는 울창한 산죽이 숲을 이루고 있다.

[의의와 평가]

고종 때 훼철되었던 소암 서원을 일제강점기에 중건한 소암 서당은 근대에 이용되었던 건축수법을 확연히 보여주고 있다. 그 예로 대청 상부의 들보는 위로 휨이 거의 없고 직선화되는 경향이 있으며 퇴칸 상부의 보 또한 통재로 된 것은 이 시기의 수법 중 하나이다. 보통 5량가로 처리해야 되는 구조적면에서도 3량가로 간략히 처리한 점 또한 그렇다. 전체적으로 건축사적 가치는 그리 높지 않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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