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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봉산 태실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301749
한자 胎封山胎室
영어의미역 Placenta Chamber in Taebongsan Mountain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금암리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이창언김찬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태실
건립시기/연도 조선 중기
관련인물 봉성군(鳳城君)

[정의]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금암리 태봉산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봉성군(鳳城君)의 태(胎)를 묻은 태실.

[개설]

예로부터 태는 태아의 생명을 부여한 것으로 간주하여 함부로 처리하지 않았다. 특히, 왕실에서는 자손이 태어나면 태를 소중하게 보관하였다. 일반적으로 태옹(胎甕)이라는 옹기에 안치하여, 좋은 장소를 선정하여 태실을 설치하여 묻기도 하였다. 태실을 설치하는 과정은 매우 까다로운 의식을 거쳐 이루어졌다. 왕실에 자손이 태어나면 우선 태를 봉안할 장소를 물색하고, 안태사와 배태관으로 하여금 태의 봉송을 맡겼다. 이와는 별도로 관리를 선정하여 태실의 역사를 담당하게 하였다. 태를 봉안한 뒤에는 각종 제례를 치렀고, 주변에 금표를 설치하여 엄격하게 관리하였다.

[현황]

일제강점기 까지만 해도 봉성군의 태실임을 알 수 있는 비각이 산 정상에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칠곡지』에는 칠곡부 북쪽에 있는 서북방 우암촌(牛巖村)에 조선 중종(中宗) 임금의 왕자 봉성군(鳳城君)의 태실이 있는 태봉이 위치한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봉성군의 태(胎)를 이 산의 정상에 묻었다고 하여 산의 이름도 ‘태봉산’이라고 붙여졌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의의와 평가]

태어난 아이의 태를 처리하는 것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가정에서 행하던 출산의례의 하나였다. 태를 처리하는 방식은 가정마다 다양한 편이었으며, 신분이 높은 집안에서는 주로 태항아리를 이용하였다. 왕실에서는 태실을 설치하여 봉안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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