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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301900
한자 六二五戰爭護國激戰地洛東江-遊鶴山
영어의미역 Defense of One´s Country Hard-Fought Field, Nakdonggang River and Yuhaksan Mountain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칠곡군지도보기지도보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일수

[정의]

경상북도 칠곡군에 있는 6·25전쟁 시기 낙동강유학산에서 가장 치열하게 전투가 벌어졌던 격전지.

[개설]

낙동강은 강원도 태백의 황지에서 비롯하여 경상북도의 한복판을 크게 한 번 휘돌아 경상남도로 흘러들어가 남해로 흘러드는 강이다. 낙동강의 발원하는 황지는 타원형으로 생겼는데 넓이가 20평 쯤 된다. 황지와 연관된 전설로 옛날에 황 부자라는 사람의 집터가 어느 날 하루 아침에 못으로 변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유학산(遊鶴山)은 높이 839m로서 ‘학이 노니는 산’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소학산·황학산과 더불어 칠곡(漆谷)을 감싸고 있다. 칠곡군 석적읍에 위치하고 있으며 낙동강과 가까이 위치하고 있다. 유학산은 동·서로 뻗어 있으며 산 머리가 거의 일(一) 자를 이루고 있다. 머리의 등성이는 바위로 되어 있고, 특히 남쪽으로 높은 바위 벼랑을 이룬 곳이 많다.

[낙동강 개요]

낙동강은 금호강, 남강, 밀양강, 양산천, 덕천강, 함안천 같은 직할 하천을 합치면 길이가 580㎞가 되며 지방 하천인 반변천(半邊川)·내성천(乃城川)·위천(渭川) 등을 비롯한 13개의 작은 지류를 합치면 길이가 1,000㎞가 되는 긴 강이다. 이 가운데 반변천은 영양과 청송을 거쳐 안동에 이르러 형성된 하천이며, 내성천은 소백산에서 흘러내린 하천이다. 금호강은 낙동강의 2대 지류의 하나라 경상북도에서는 낙동강 다음으로 큰 강이다. 금호강은 경산과 영화를 끼고 흐르다가 대구로 흘러들어와 낙동강과 만난다.

낙동강 주변의 주요 평야로는 상류부의 안동분지, 중류부의 대구분지, 하류부의 경남평야 등이 있다. 안동분지는 침식분지들이 연결된 비교적 규모가 큰 분지이고, 대구분지는 낙동강 본류와 금호강 등 여러 지류의 연안에 분포하는 평야이다. 하류부의 경남평야는 창녕 이남의 본류 연안과 남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평지 및 김해평야를 포함한다. 낙동강 하류부에 발달된 김해평야는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충적평야이다. 낙동강 유역의 주요 식물상을 보면 상·중류 지역은 남부 난·온대 낙엽·활엽수림 지대, 하류 지역은 조엽(照葉)수림대에 속한다. 최근 낙동강 하류 지역에 대한 식물 조사에 의하면 총 151과 910종의 식물이 분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국시대에는 황산하(黃山河)·황산강(黃山江)·황산진(黃山津) 등으로 불렸고 고려·조선시대에 와서는 낙동강·낙수(落水)·가야진(伽倻津) 등으로 불렸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낙수로, 『택리지』에는 낙동강으로 기록되어 있다. 본래 낙동이란 가락(駕洛)의 동쪽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 고려·조선시대를 통하여 낙동강은 영남 지방의 산물·세미(稅米) 등의 운송로로 이용되었는데, 당시 가락국의 땅이었던 '상주의 동쪽으로 흐르는 강'이란 뜻으로 낙동강이라 불리게 되었다. 『연려실기술』 지리전고(地理典故) 편에도 “낙동강은 상주의 동쪽을 말함이다”라고 되어 있다.

낙동강은 유역이 기름진 충적지인 만큼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역사와 문화도 깊었다. 선사시대를 거쳐 삼한(三韓)시대의 변한과 진한, 가야와 신라는 모두 낙동강 유역에서 생기고 번성하였다. 경북의 상주에 위치한 낙동리에는 의성군과 이어지는 나루터가 있었는데, 지난날 서울과 영남 지방을 물길로 잇던 관문 노릇을 톡톡히 하였다. 또한 낙동강은 강 중·상류의 내륙과 강 하단의 바닷가를 잇는 무역로 역할을 맡았었는데, 강 하류의 하단에서 소금과 해산물을 실은 배들이 밀양·남지·대구·선산 등을 거쳐 안동까지 올라왔으며, 내려 갈 때는 내륙의 쌀과 콩 따위의 농산물을 실었다. 이같이 낙동강은 영남의 대동맥 구실과 함께 서울과 영남을 잇는 관문이었다.

[유학산 개요]

유학산에는 촛대바위[상투바위], 쉰 길이나 된다 해서 쉰질바위[학바위], 신선바위 등 명물바위가 많다. 산 아래에서 위를 쳐다보면 바위가 많아 바위산으로 보이지만 막상 정상에 서 보면 육산이다. 낙동강에 위치한 유학산은 산에서 대구까지의 직선거리가 25㎞에 지나지 않고, 팔공산[높이 1,192m]과 가산[높이 902m]를 잇는 지맥(支脈)이어서 대구 진출에 유리한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낙동강유학산 일대는 대구 사수, 나아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수 있는 중요 전략 요충지였다.

[낙동강 방어선의 형성]

6·25전쟁 당시 낙동강은 전쟁에서 가장 치열하게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기도 하며, 남한 땅을 지키는 마지막 방어선 노릇을 했다. 6·25전쟁이 발발한지 불과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낙동강을 경계로 하여 동쪽 지역을 뺀 나머지는 모두 공산군에 점령당하였다. 이때 유엔군 총사령관 미국의 워커 중장은 부산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한 마지막 저지선으로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방어선을 워커 중장의 이름을 따 ‘워커라인’이라고도 불렀으며, 또 부산을 기지로 총반격을 위한 교두보라는 의미에서 이른바 부산 교두보라고도 하였다.

6·25전쟁이 일어난 뒤 한·미 연합군은 축차적인 지연작전을 전개하였다. 최초의 방어선은 평택-안성-삼척에 걸쳐 펼쳐졌으나 7월 6일 북한군에게 돌파되었다. 한·미 연합군은 다시 금강과 소백산맥에 방어선을 쳐 북한군의 남진을 막고자 하였으나 7월 16일 붕괴되었다. 7월 16일 금강 방어선이 무너지자 미군은 전략적 요충지인 대전을 사수할 계획을 세웠으나, 대전이 북한군에게 점령됨에 따라 전선은 계속 남쪽으로 밀리게 되었다.

전쟁의 위기 속에서 군사적인 측면을 고려할 때, 방어에 유리한 지형은 북한군에게 모두 밀리는 형국에서 마지막으로 낙동강을 연한 선이 남아 있었다. 왜관에서 남지에 이르는 낙동강 본류는 지형적으로 방어에 적합한 지역이었다. 낙동강은 강폭이 400~800m에 달하고, 물이 흐르는 부분은 200~400m이며, 수심은 1~1.5m 이상으로 강을 건너기가 쉽지 않았다. 또 이곳 낙동강의 동서 양안(兩岸)은 깎아 세운 듯한 산이 많고 언덕이나 평지가 없어 도하가 어려웠고 대규모 병력이 이동하기에도 쉽지 않았다. 이와 같은 지형 때문에 낙동강은 공격자인 북한군 보다는 방어자인 국군에게 유리한 지형적 특징을 지녔다.

6·25전쟁에서 유엔군이 참전한 이래 유엔군 지상군에 대한 작전 지휘권을 갖고 있던 미 제8군사령관 워커 중장은 전쟁 발발 한 달 동안의 지연작전이 무기력하게 무너지는 불리한 전쟁 상황을 타개하고, 낙동강의 지형적 특징을 고려해 낙동강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구상하게 되었다. 워커 중장의 낙동강 방어선 구상은 대전 북방의 금강-소백산맥 방어선이 돌파된 직후인 7월 17일 무렵이었다. 워커 중장은 작전 지휘부와 함께 국군과 미군 및 증원부대의 상황, 유엔 해·공군의 지원, 북한군의 상황, 남한의 지형, 부산항의 여건과 상태에 관한 각종 자료를 다각적으로 분석하였다. 분석을 마친 뒤 미 제8군은 낙동강에 방어선을 구축하여 최후의 교두보로 선정하고, 여기에서 북한군의 남진을 막은 다음 총반격을 실시한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런 배경으로 형성된 낙동강 방어선은 칠곡군 왜관읍을 꼭지점으로 하여 북쪽으로는 동해안의 영덕에 이르며 서쪽으로는 낙동강 본류가 남강과 만나는 경상남도 창녕군 남지읍에 걸쳐진 ‘「 ’ 모양의 방어선이다. 방어선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된다. 첫 번째 구간은 낙정리-왜관-남지를 잇는 낙동강을 이용한 방어선이다. 두 번째 구간은 남지에서 마산 서쪽 진동리를 잇는 낙동강과 남강의 합류 지점으로부터 남해안까지로 전투산[높이 661m], 필봉[높이 742m], 서북산[높이 738m] 등 험준한 고지(高地)로 형성되어 있다. 세 번째 구간은 낙정리-영덕-낙동강 상류의 남쪽 태백산맥의 험준한 산악 지대이다. 따라서 낙동강 방어선의 대부분은 하천과 고지군 등 자연장애물로 형성되어 외곽 방어선의 유지가 용이할 뿐 아니라 부산을 중심으로 방어선에서 주요 지점인 마산, 남지, 왜관, 낙정리, 의성, 영덕까지 도로망이 잘 발달되어 있어 방어선 안에서 작전을 수행하는데 적합하였다.

한편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는 8월초 낙동강 방어 계획을 검토하면서 미 제8군에게 낙동강 방어선 붕괴에 대비하여 부산 주변 해안의 상륙 거점을 방어하기 위한 예비 방어선을 확보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에 미 8군 공병참모 데이비드슨(Garrison H. Davidson) 준장이 8월 11일부터 9월 1l일까지 경상남도 울산 동북방 17㎞ 지점 서동리에서 밀양 북방 유천과 무안리를 따라 마산 동북을 잇는 90㎞의 예비 방어선을 구축하였는데, 이른바 ‘데이비드슨 라인’이라고 한다. 낙동강 방어선의 구축은 전쟁 발발 후 지연작전에 최대 취약점이었던 부대 배치상의 간격을 최소화할 수 있게 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낙동강 방어선 철수와 부대 배치]

미 제8군은 적의 남진을 지연시키면서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는 한편 7월 26일 전군(全軍)에 낙동강 방어선으로 철수 준비 명령을 하달하였다. 미 제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은 7월 29일 “한 치의 땅이라도 적에게 빼앗기면 수많은 전우의 죽음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이른바 전선 사수(Stand or Die) 명령을 하달하여 전의(戰意)를 다졌다. 그 뒤 8월 1일 워커 중장은 한·미 연합군에 낙동강 방어선으로의 철수 명령을 하달하였다. 먼저 8월 3일까지 낙동강 외곽선(X선)에서 적을 지연하면서 새로운 방어선이 될 낙동강 방어선(Y선)에 대한 정찰을 시도하였다. 그 뒤 8월 4일부터는 Y선에서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도록 하였다. 또 같은 날 새벽 유엔군은 왜관철교를 비롯한 낙동강에 걸쳐진 모든 다리를 폭파하였다.

미군은 8월 3일까지 낙동강 방어선으로 철수를 완료하였다. 국군의 낙동강 방어선으로의 철수는 육군본부의 작전명령에 따라 이루어졌으며 역시 8월 3일 철수를 완료하였다. 이날 야간에 낙동강 방어선으로 진지 전환을 완료하고 방어 편성에 주력하였다. 육군본부와 미 제8군사령부는 대구에 자리 잡고, 제1군단사령부는 경북 의성에, 제2군단사령부는 경북 군위에 자리 잡고 낙동강 방어 작전에 임했다. 낙동강 방어선에는 국군 제1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이 낙동강 방어를 위한 진지 편성과 부대 전개를 마쳤다. 국군 제1사단은 정면의 북한군 제1사단·제13사단·제15사단 등 3개 사단이 남진을 막는 임무를 가졌고, 미 제1기병사단은 정면의 북한군 제3사단과 제105전차사단이 남진을 저지하는 임무를 맡았다.

낙동강 지역에 투입된 양측의 병력을 보면, 북한군은 국군에 비해 10배 정도 우세하였다. 북한군은 T-34전차 20대, 122밀리 곡사포 20문, 76.2밀리 곡사포 60문, 76밀리 자주포 20문, 45밀리 대전차포 50문, 120밀리 박격포 20문, 82밀리 박격포 150문, 61밀리 박격포 180문 등을 보유하였다. 국군 제1사단의 방어 정면은 42㎞에 달할 정도로 넓은 반면 사단의 병력 수준은 70%였고, 중화기도 북한군에 비해 30 내지 40% 정도에 불과하였다. 제1사단이 7월 하순 경북 상주에서 병력을 증원받고 무기를 보급 받으면서 전투력을 갖추게 되었다.

국군 제1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이 맡고 있던 낙동강 방어선은 서울과 부산을 연결하는 경부국도와 경부철도, 다부동과 대구를 연결하는 5번 도로, 그리고 왜관과 대구를 연결하는 국도 등 도로망이 잘 발달되어 있었다. 특히 도로들 사이에는 횡적으로 발달된 소백산맥의 끝자락이 낙동강과 조화를 이루어 방어자의 입장에 있는 유엔군과 국군에는 유리하였으나 낙동강을 도하해야 하는 북한군에게는 불리한 지형적 조건이 형성되어 있었다. 낙동강 방어작전에서 42㎞에 달하는 광역을 부여받은 국군 제1사단은 낙동강 연안 방어가 적절하지 못할 것이라 판단하여 방어에 유리한 다부동 일대로 철수하여 거기에서 북한군의 남진을 막는 작전을 수립하였다.

[낙동강 방어선 전투와 결과]

낙동강을 사이에 놓고 피아(彼我)간에는 왜관전투, 현풍전투, 창녕전투, 영산전투 등의 격전이 벌어졌다. 이 중 유학산다부동전투의 중심에 놓여 있었다. 대구를 지키려는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다부동 쪽에서 대구로 진입하려는 인민군과 맞붙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당시 왜관에서 다부동을 잇는 방어선은 낙동강의 교두보였다. 낙동강유학산 일대에는 국군 제1사단과 미 제27연대와 북한군 제13·3·1·15사단 등이 맞서 전투를 벌어졌고, 8월 13일부터는 12일간 산 정상의 주인이 15번이나 바뀌는 328고지[포남리] 전투와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내었던 837고지[학산리] 전투 등 55일간 전투가 계속된 6·25전쟁 중에서 최대의 격전지였다. 여러 전투를 통해 북한군은 1만7천여 명의 사상자가 났고 국군 및 유엔군도 1만여 명이 희생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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