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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301901
한자 -名聲-再跳躍-漆谷
영어의미역 Takes Back the Reputation of Former Times and Chilgok Which Rejump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칠곡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홍상철

[정의]

경상북도 칠곡군의 역사적 의미와 현재와 미래의 발전 전망.

[칠곡의 뿌리는 어디인가]

우리는 흔히 이런 생각을 해본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의 역사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그리고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가. 어느 지역이나 나름대로의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구전이나 기록물에 의하여 그 역사를 알 수 있고 한편으로는 선조들이 남긴 유물과 유적을 통하여 알 수도 있다. 그럼 칠곡군 지역에는 언제부터 우리의 조상들이 살았을까. 정영화 교수의 『한국구석기문화의 연구』에 따르면 칠곡군 석적읍 중리 일원에서 구석기시대의 유물인 르발루아첨기와 찍개, 돌망치 등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칠곡군 일원에도 구석기 이전 아득한 시절부터 우리의 선조들이 생활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만 그 흔적이나 정확한 기록이 없어 좀 더 자세히 알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웅부 칠곡으로 자리잡다]

칠곡의 본래 명칭은 팔거리현(八居里縣)이었다. 이후 북치장리, 인리, 팔리현, 팔거현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었다. 신라 경덕왕 때에는 팔리(八里)로 불리면서 현재 대구 수성구 일원에 있던 수창군에 속해 있기도 했다. 고려 초기에는 팔거현(八居縣)으로 바뀌고 지금의 성주 일원인 경산부에 속해 있으면서 칠곡(七谷)이란 별호로 불리었다.

비록 흙속에 묻혀 있을지라도 보석의 진가는 변하지 않는다. 언젠가는 그 진가를 알아보고 찾아내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칠곡이 그러한 듯하다. 우리 민족이 터전을 잡은 한반도는 지정학적 영향으로 수많은 외침을 받았다. 고조선에서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칠곡도 수많은 외침으로부터 결코 피해 갈수는 없었다.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외침을 들라면 단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일 것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칠곡의 전략적 가치는 드러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 칠곡의 가치를 발견한 사람은 경상도 관찰사 이명웅(李命雄)이었다. 관찰사 이명웅은 칠곡이 부산에서 출발해 ‘대구~문경새재~충주~한양’으로 이어지는 최단거리 길목인 동시에 낙동강을 통하여 왜구들이 직접 들어 올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임을 한눈에 알아봤던 것이다. 1640년에 내성이 완공되고 팔거현칠곡도호부로 승격하면서 관아를 가산산성 내에 설치했다. 당시 칠곡도호부는 인근 지역인 군위, 의흥, 신령, 하양까지 관할하는 웅부(雄府)였다. 팔공산을 중심으로 한 인근 지역 전역을 관장하는 규모였다.

[가산산성을 쌓은 이명웅은 누구인가]

이명웅(李命雄)은 병자호란 때 인조 임금을 직접 호종하여 남한산성으로 피난하면서 전란의 무서움을 몸으로 겪은 인물이었다. 척화론(斥和論)을 주장했던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다. 병자호란 당시 강력한 척화론자로 청나라와 화의가 성립된 이후 자청하여 소현세자를 따라 청나라에 볼모로 갔었다. 귀국 후에는 대사간과 경상도관찰사, 예조참의를 지냈으며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이명웅은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하면서 임금에게 경상도 60여 개의 고을 산성 중에서 믿을 만한 곳은 진주성과 금오산성, 천생산성 밖에 없으니 전략적 요충지를 찾아 산성을 쌓아야 한다고 주청했다.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 후 가산(架山)의 전략적 중요성을 조정에 보고하고 가산산성을 쌓아 후일 전란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청해 1640년 내성을 완공했다.

[수족을 자르는 아픔]

1640년 칠곡도호부가 설치되면서 본격적인 칠곡의 시대를 열었다고 볼 수 있다. 칠곡이란 지명은 도호부가 있던 가산(架山)이 일곱 개의 골짜기로 이루어졌다는데서 유래했다. 1895년 8월 13일 고종황제의 칙령 제98호에 의하여 칠곡군이란 공식 명칭을 사용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인근 지역과의 병합을 거듭했다. 칠곡도호부 당시에는 팔공산을 중심으로 군위, 의흥, 신령, 하양까지 관할하는 큰 고을이었다. 대한민국 건국 후 1949년 8월 13일 대통령령에 의하여 군청 소재지인 왜관면이 왜관읍으로 승격할 당시도 1읍 8면 1출장소를 갖춘 웅군(雄郡)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지방자치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중앙집권체제 하에서 성장 잠재력이 높았던 칠곡군은 중앙 정부의 일방적인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하여 수족을 잘라내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가장 먼저 다른 지역으로 편입되는 아픔을 겪은 곳은 북삼읍 낙계동이다. 낙계동은 1973년 7월 1일에 당시 선산군 구미읍으로 편입되었다. 중앙 정부의 행정 편의에 의하여 당시 낙동강 서편을 중심으로 구미국가산업1단지가 조성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다. 구미로 편입된 낙계동은 현재 남구미대교 부근의 구미국가산업1단지 일대다. 칠곡군으로서는 결코 주고 싶지 않았던 지역이었다. 중앙 정부에 의한 행정구역의 조정은 계속적으로 이루어졌다. 낙계동의 구미 편입 5년 뒤인 1978년에는 인동면이 또다시 구미시에 편입되는 불운을 겪으면서 칠곡군의 군세는 크게 약화되기 시작했다. 1980년 12월 1일에 칠곡면이 칠곡읍으로 승격하는 기쁨을 맛보기도 했으나 승격 7개월 만인 1981년 7월1일 대구시가 대구직할시로 승격하면서 칠곡읍 전체가 대구광역시로 편입되었다. 당시 칠곡읍은 금호강을 경계로 태전동과 읍내동 등 13개 동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이었다. 편입된 칠곡읍의 면적은 50.45㎢로 현재 칠곡군 전체 면적 450.91㎢의 11%에 해당하는 큰 면적이다.

2년 후인 1983년 2월 15일에는 북삼읍 오태동이 또다시 구미시로 편입 당하는 불운을 겪었다. 이로써 1읍 8면의 웅군으로 출발했던 칠곡군은 10년이란 짧은 기간 동안 2개 읍면과 2개 동이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타 지역에 편입됨에 따라 경상북도 내에서 가장 작은 군으로 전락하는 비운을 겪었다. 당시 대구와 구미로 편입되었던 지역은 상전벽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변해 있다. 대구 북구 출장소가 설치된 과거 칠곡읍 일원은 현재 21만8천여 명의 인구가 생활하는 신도시로 변했다. 구미시로 편입된 낙계동은 구미1공단이 자리 잡고 있으며 오태동은 인구 1만여 명의 신도시가 조성됐다. 인동 지역은 현재 인동동, 진미동, 양포동 일원으로 10만2천여 명의 인구가 생활하는 대규모 주거 지역과 공업 지역이 공존하는 자족형 도시로 변모한 곳이다. 이곳에는 구미 국가산업1·2·3단지가 입지해 있다.

[인구가 재산이다]

국가는 물론 지방자치단체의 규모와 성장 가능성을 나타내는 최고의 척도는 인구수가 가장 우선된다. 지역이나 조직을 이끌고 나가는 기본은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칠곡군의 인구 변화를 보면 혹자는 통계 숫자의 오류가 아닌가 의심하기도 한다.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에 들어와 인구 수의 등락폭이 너무나 뚜렷하기 때문이다. 196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칠곡군의 인구는 대략 11만 명 내외였다. 10여 년 정도를 11만 명 대를 유지해 왔었다. 그러나 1981년에 와서는 8만4천여 명으로 급감했다.

무려 2만8천여 명이 줄어든 것이다. 칠곡읍이 대구직할시로 편입에 따른 후유증이다. 칠곡군으로서는 1895년 고종황제의 칙령에 의하여 칠곡군이란 명칭을 사용한 이래 가장 큰 군세의 위축이었을 것이다. 중앙 정부의 일방적인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웅군이던 칠곡군은 당시 경북도 내 33개 시군 중에서 가장 약체의 군으로 전락했었다. 인구수는 물론 재정 규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1986년 4월 1일 약목면 동부출장소기산면으로 승격되어 1읍 7면이 되고 지리적 여건과 편리한 교통망을 바탕으로 한 지속적인 지역개발을 통하여 군세의 회복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1995년 본격적인 지방자치 시대가 문을 열면서 칠곡군의 변화는 눈에 띄게 달라졌다. 10여 년째 7만 명 대에 머물렀던 인구는 크게 늘어 8만 명 대로 진입했다. 많게는 1년에 1만여 명이 증가하는 때도 있었다.

이러한 인구 증가는 계속되어 2000년에 들어서면서 인구 10만 명 시대를 열었다. 1981년 8만 명의 인구로 추락한 지 10년 만에 본래 위치를 회복한 것이다. 이후 칠곡군의 인구는 계속적인 증가를 거듭해 2011년 8월 현재 12만 2천여 명이다. 이러한 변화에 따라 2003년 7월 1일에는 북삼면이 북삼읍으로 승격했다. 3년 뒤인 2006년 10월 1일에는 석적면이 석적읍으로 승격해 3읍 5면의 시대를 연 것이다. 동시에 경북 도내 군부 중에서 유일하게 인구가 증가하는 지역이 됐다. 칠곡군의 목표는 이러한 여세를 몰아 인구 20만 명의 첨단 기술과 물류 유통기능, 생산 시설을 갖춘 도·농복합 칠곡시를 만드는 일이다. 이러한 목표 설정은 실현 가능한 것으로 군민들은 희망적인 기대가 크다.

[젊은 칠곡]

칠곡의 인구 구조는 매우 탄탄하다. 급속한 고령화에 따라 전국 대부분 지역이 고령화 사회를 넘어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추세와 다르게 칠곡군은 평균 연령 37세의 젊은 사회다. 인구 증가의 주요인도 출생과 구직을 위한 젊은 층의 전입이다. 최근 급격한 인구 유입으로 신도시를 이룬 북삼읍석적읍 지역을 들어서면 젊은 열기를 한 몸으로 느낄 수 있다. 낮 시간대 아파트 단지에는 언제나 유모차를 몰고 다니는‘유모차부대’를 만날 수 있다. 밤에는 거리로 쏟아져 나온 젊은 근로자로 넘쳐난다. 젊은 도시라는 말이 실감나는 현장이다. 이러한 젊은 인구의 유입 덕분에 불과 10년 전만해도 폐교를 걱정하던 장곡초등학교는 학급 수가 38학급으로 크게 늘어났다. 인근에 있는 대교 초등학교도 2005년 개교 이후 학생수가 46학급에 1,296명으로 크게 늘어나 조만간 증설을 걱정할 정도다.

이러한 추세는 각종 통계자료가 입증한다. 2010년의 주민등록상의 인구 변화를 보면 극명하게 들어 난다. 한 해 동안 출생 인구는 1,790명으로 사망 인구 770명의 2.3배에 이른다. 통계청의 2010년 출생 통계를 살펴보면, 인구 1천 명당 출생아 수를 나타내는 조출생율을 보면 수도권과 비수도권과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조출생율 전국 1위는 16.5%인 경기도 화성시가 차지했다. 최하위는 4.4%의 경북 군위군이 차지했다. 수도권 지역과 비교할 때 대략 4배의 차이를 나타낸다. 반면에 칠곡군은 15.2%로 전국 3위를 차지했다. 1위인 경기도 화성시 보다 불과 1.3%가 낮다. 인구 집중 현상이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수도권과 견주어도 크게 손색이 없는 조출생율이다. 이만큼 칠곡군의 인구 분포가 젊다는 증거 중의 하나다. 참고로 대구·경북의 31개 자치단체 중에서 조출생율 10위권에 들어간 지역은 칠곡군을 제외하면 하나도 없었다. 이러한 추세로 젊은이들이 칠곡군으로 몰려드는데 대하여 대부분의 주민들은 많은 일자리와 편리한 교통망을 바탕으로 한 높은 개발 잠재력을 꼽고 있다.

[3읍 시대를 열다]

칠곡군에는 3개의 읍이 있다. 전국에서 3개의 읍을 가진 자치단체는 흔하지 않다. 전국적으로 3개 읍을 가진 지역이 드물게 있지만 칠곡군의 경우와는 다른 사례이다. 다른 지역의 읍은 지리적 특수성에 의하여 읍이 형성된 곳들이 많다. 현행 지방자치법상 읍의 인구 기준은 2만 명이다. 그러나 많은 읍들은 현행법에서 규정된 인구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곳이 대부분이다. 경상북도 내에만 해도 23개 시군에 36개의 읍이 있다. 그 중에서 인구 2만 명을 넘는 곳은 10개 읍 정도다. 포항시의 연일읍과 오천읍, 흥해읍을 비롯해 경주시의 안강읍, 구미시 고아읍, 경산시 하양읍과 진량읍이 2만 명을 넘는 곳이다. 칠곡군을 제외한 12개 군에서 인구 2만 명을 넘는 읍은 전무하다. 인구 2만 명을 넘는 나머지 3개 읍은 칠곡군에 있다.

2011년 8월 현재 칠곡군의 군청소재지인 왜관읍은 32,707명이다 북삼읍은 25,445명, 석적읍은 28,968명이다 북삼읍석적읍도 조만간 3만 명을 돌파할 것으로 보인다. 경상북도 내 타 시·군의 읍과 비교할 수 없는 인구수다. 타 시·군의 경우 대부분이 1만 명 내외이며 적은 곳은 5천 명을 밑도는 곳도 있다. 이런 지역과 비교하면 칠곡군의 인구 변화는 혁명적이라 할 수 있다. 칠곡군에서 처음 읍으로 승격한 곳은 왜관읍이다. 1949년 8월 13일의 일이다. 이후 5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난 2003년 7월 1일에 북삼읍이 인구 2만 명을 돌파해 북삼읍으로 승격했다. 당시 경북도 내 모든 시군으로부터 부러움을 샀다. 모든 시·군이 인구 감소와 고령화를 걱정하던 시점에서 읍 승격은 부러움의 대상이 됐다. 그로부터 3년 뒤인 2006년 10월 1일 석적면이 또다시 석적읍으로 승격하자 모두들 칠곡군의 성장 잠재력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이후에도 인구 증가는 계속되고 있고 이를 바탕으로 도·농 복합형 칠곡시 승격을 준비 중에 있다. 오늘도 수많은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고 개발 잠재력을 믿고 칠곡군으로 몰려오는 행렬은 멈추지 않고 있다. 이러한 추세라면 칠곡군이 목표로 하는 2020년 인구 20만 명의 자족형 도시 건설은 충분하다는 평이다.

[자타가 인정하는 칠곡군의 경쟁력]

‘팔은 안으로 굽는다.’와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곱다.’는 속담이 있다. 이것은 주관적 평가와 판단을 경계하는 뜻일 것이다. 우리 인간들이 모든 판단을 할 때 자기중심적으로 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속담처럼 모든 평가에서 자기평가에는 후한 점수를 주면서 남에 대한 평가에서는 박한 점수를 주는 것이 대부분이다. 본격적인 지방자치 시대를 맞으면서 많은 공공기관이나 단체에서 지방자치단체에 대한 수많은 평가를 하고 있다. 행정 전반에 대한 평가는 물론 분야별로 세분한 평가도 많다. 그 중에서 많은 사람들과 자치단체에서 큰 관심을 가지는 분야가 ‘경쟁력 부문’일 것이다. 한 지역에 대한 경쟁력 평가는 곧 그 지역의 미래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칠곡군의 경쟁력은 최근의 전국 기초자치단체에 대한 평가 결과를 보면 나타난다. 칠곡군은 행정 전 분야에 대한 다양한 평가에서 우수한 평가를 받았다. 평가는 교육인적자원부, 행정안전부 등 정부기관과 한국공공자치연구원, 국가지역경쟁력연구원, 한국언론인포럼 등 다양하다. 이러한 평가 가운데에서 근래 6년 동안 칠곡군은 전국평생학습대상을 비롯해 중소기업육성시책, 환경대상 등 행정 전반에 대하여 총 77회에 걸쳐 우수 기관으로 선정되는 영광을 얻었다.

경쟁력 부문이 단연 돋보인다. 지난 2005년 지방자치 시행 10년을 맞아 한국언론인포럼에서 실시한 지방자치 10년 살기좋은 도시 대상 수상은 물론 2007년엔 한국공공자치연구원이 전국의 230개 지방자치단체를 대상으로 한 경쟁력 조사에서 칠곡군이 경영자원 부문에서 전국 1위를 차지해 다른 단체의 부러움을 받았다.

2008년 들어서도 지난 5월에 국가지역경쟁력연구원이 전국의 자치단체를 대상으로 한 경쟁력 평가에서 칠곡군이 도시경쟁력 비교우위 부문에서 전국 최우수 기관으로 선정됐다. 도시경쟁력 평가는 자치단체의 공공 자본과 인프라 구축 상태, 생산성, 인적 자원, 삶의 질 향상 등 행정 전반에 대한 평가여서 더욱 빛나보였다. 2008년 8월에는 매일경제신문이 전국의 230개 지방자치단체를 대상으로 비교 우위와 성장발전 등 7개 분야에 걸친 경쟁력 평가에서 대구·경북의 31개 시·군 중에서 종합순위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특히 이번 평가에서 상대적으로 발전이 지연되고 있다고 평가되던 군부에서 경북의 10개 시와 대구광역시의 7개 구청을 제치고 최우수 성적을 거두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로 평가받고 있다. 칠곡군이 경쟁력 부문에서 연이어 우수한 평가를 받은 데 대하여 많은 사람들은 편리한 교통망과 풍부한 인적 자원을 바탕으로 지속적으로 지역개발을 추진한 결과로 보고 있다.

[탄탄한 살림살이]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속담이 있다. 살림살이가 넉넉해야 예절을 차리고 자랑할 것과 부끄러워해야 할 것을 가릴 줄 안다는 것이다. 아무리 학문이 높고 고귀한 인품을 지녔다 할지라도 재정이 뒷받침하지 않으면 개인이나 국가나 오래 지탱할 수 없다. 이를 두고 맹자(孟子)도 항산항심(恒産恒心)이라 했다. 일정한 직업과 재산을 가진 자는 그 만큼 여유가 있으나 그렇지 않은 자는 정신적으로 늘 불안정하여 동요하기 쉽다는 뜻이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국가는 물론 자치단체도 충분한 재정력의 확보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재정이 넉넉하지 못하면 지역 발전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기 어렵고 갈수록 높아지는 주민의 욕구를 충족시키기는 쉽지 않다. 그럼 인구가 계속적으로 증가하는 칠곡군의 재정력은 어떠한가. 칠곡군의 재정 규모 변화를 보면 인구 변화 속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10년 전인 1998년과 현재를 비교 해보면 천양지차다. 10년 전 칠곡군의 전체 예산은 1,314억원이었다. 13년 후인 2011년의 전체 예산액은 3,281억원이다. 13년 만에 1,967억원이 늘어난 것이다. 비율 면에서는 250%가 증가했다. 불과 13년 만에 2.5배 정도가 증가한 것으로 재정 구조도 탄탄하다. 2011년 현재 재정 자립도는 29.20%로 경북도 내 군부 중에서 최고로 높다. 2위인 경상북도 성주군 15.8%과 비교해도 매우 높은 수치이다. 전국 기초자치단체 군부의 재정 자립도가 17.5%인 점을 감안하면 대단히 높은 수준이다. 이렇게 늘어난 재정 규모로 지역개발은 가속화 되고 있다. 칠곡시 승격에 대비한 도시 인프라 구축과 주민 생활 편의시설 확보에 주력함으로써 시 승격에 전혀 손색이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칠곡에 살고 싶어요!]

사람들은 항상 현실에 안주하기를 갈구하는 욕망과 현재의 상황에 언제나 부족함을 느끼고 탈피하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일종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칠곡군에서 생활하는 주민들의 생각은 어떠할까. 지난 2007년에 전문기관에 의뢰해 20세 이상 성인 남녀 800명을 대상으로 군정 만족도 및 행정서비스 만족도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한 적이 있다. 조사 당시 응답자의 78.16%가 타 시·군과 비교해 살기 좋은 곳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칠곡군에 계속해서 살고 싶다고 응답했다. 군정의 수행 방법에 대하여는 69.1%가 잘한다고 응답해 군정 수행 전반에 대하여 긍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앞으로 칠곡군이 중점적으로 추진해야 할 역점 사업으로는 35.5%가 지역개발을 들고 22.5%가 미래비전 제시를 들었다. 앞으로의 칠곡군의 비전에 대하여는 52.4%가 발전 속도가 더욱 빨라질 것으로 답변해 칠곡군의 장래가 매우 밝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주민들의 이러한 긍정적 답변은 칠곡군의 생활 여건이 양호하고 앞으로 발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자리 창출을 위한 산업단지 조성 등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여 생활 안정을 기할 수 있고, 개발 가능성이 높은 지역이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 된다.

[칠곡군 어디로 갈 것인가]

칠곡군이 내세우는 개발 방향은 무엇인가. 칠곡군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인구 20만 명의 자족형 첨단 도·농 복합 도시를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목표를 위하여 무한한 개발 잠재력을 바탕으로 개발과 현경이 조화를 이루는 도시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이러한 목표 달성은 충분할 것으로 지역 주민은 물론 지역 학계에서도 예측하고 있다. 이와 함께 생활이 편리한 도시 기능과 쾌적한 주거 환경을 갖춘 살고 싶은 전원도시, 평생교육과 고품격의 문화가 어우러진 교육문화도시, 낙동강과 호국 유적이 어우러진 관광휴양도시, 영남권 내륙화물기지와 연계한 전국 제일의 물류중심도시, 구미~칠곡~대구~경산을 연결하는 정보통신(IT)산업의 중심 도시를 만들기 위해 전력 질주하고 있다. 이러한 과제들이 하나하나 이루질 때 12만 군민이 염원하는 도·농 복합 칠곡시 승격과 함께 예전의 화려한 명성을 되찾아 재도약하는 대구·경북의 중심도시가 될 것이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