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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의 8월 대공세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3B020203
분야 지리
지역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정재술

왜관-다부동 전선은 대구를 점령하려는 북한군 4개 사단의 주 공격선이었다.

그리고 이곳은 국군에게도 주 저항선이며 최종적으로 고수해야 할 방어선이었다. 장비와 병력, 수송력 등 종합적인 전력 면에서 볼 때, 북한군은 이곳 전선을 돌파하지 못하면 상대적으로 힘이 빠지게 되어 있었다. 38선에서부터 길게 늘어진 보급로에 미군 폭격이 계속되면서 전력이 바닥이 나 있었던 것이다. 반면에 국군은 버티는 데 성공하면 전력이 수직으로 상승하여 반격에 나설 수 있었다. 그래서 북한군은 남은 기동력과 타격력을 총 동원해 속전속결로 이 문제의 전선을 뚫으려고 몸부림을 쳤다. 그러니 이곳에서 연일 치열한 전투가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김점곤(金點坤) 당시 국군 제1사단 12연대장은 그 때의 전투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우리 12연대가 방어한 수암산에서 유학산까지의 약 8㎞ 지역에서는 연일 시산혈하(屍山血河)의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유학산낙동강 남안에 넓게 퍼진 돌산인데 정상을 중심으로 바위틈에 양쪽 병력이 꽉 교착되어 주로 수류탄전이 벌어졌어요. 이 정상을 빼앗기면 적 포병이 대구시를 내려다보게 되는 요지입니다. 수류탄을 하루 종일 던지는 끝없는 소모전이 매일 전개됐는데, 사병들의 오른팔 어깨가 수류탄을 너무 던져 퉁퉁 부을 지경이었어요. 유학산 전투에서 우리 연대가 입은 사상자는 3천여 명이나 됩니다.

신임 소위가 후방에서 보충돼 오면 유학산 꼭대기까지 자기 소대를 찾아 올라가느냐가 문제였어요. 카빈을 메고 올라가다가 적 포탄에 수없이 희생됐지요. 나중에는 소대장과 분대장이 모자라 하사관을 현지 임관한 것은 물론, 연대본부 요원 150명을 분대장 또는 소대장으로 임명하여 모두 전선으로 내몰았습니다. 그 대신 150명의 여고생으로 후방 요원을 충당하기도 했습니다. 의외로 이것이 우리 연대의 전력 발휘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한편 김일성은 김천에서 8월 15일까지 대구를 점령하라는 시한부 명령을 내렸다. 이에 북한군은 그 명령을 지키기 위해서 발악적으로 총 공격을 가했다. 각 전선마다 독전대를 투입하고, 후퇴하는 자는 그 자리에서 사살했다.

국군 제1사단 각 연대는 앉아서 기다리지 않고 특공대를 편성해서 적진에 들어가 탱크를 기습했다. 각 연대는 적의 T34탱크를 부술 수 있는 3.5인치 바주카포를 2문식 갖고 있었다. 이 특공작전에서 아군은 적의 탱크 17대를 파괴하였다.

전선은 전후좌우를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나날이 치열해져 갔다. 밤낮으로 혼전이 계속되었다. 한바탕 전투가 벌어진 후 병력을 점검하다 보면 북한군 여러 명이 뒤섞이는 일까지도 벌어졌다. 사단장은 대대 지휘소로 내려갔고, 연대장은 중대 지휘소에 나갔다. 중대장은 본대 진지로, 소대장은 소총병과 함께 나섰다. 오직 혈전과 사투가 있을 뿐이었다. 이 전투는 결국 아군과 적군을 합해 약 3만 명의 희생을 치르고 난 뒤에야 겨우 멈출 수 있었다. 그 어느 전투가 이보다 치열하고 참혹했을까.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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