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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도 대여섯 번씩 뺏고 빼앗긴 유학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3B020204
분야 지리
지역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순하

1950년 6월 25일 일어난 전쟁 발발 후 3일 만에 서울은 점령당했다. 그리고 25일 만에 다시 대전을 점령당하여 한국군은 한 달 만에 낙동강까지 후퇴했다. 대구는 당시 대한민국의 임시수도였으며 한국의 모든 부처(部處) 및 미8군 사령관과 육군본부, 해군본부 등의 사령부가 내려와 있었다.

7월 29일 미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은 북한군의 공격에 대한 최후의 방어선으로서, 낙동강과 그 상류 동북부의 산악지대를 잇는 천연장애물을 이용한 방어선을 구축하여 이를 사수하기로 하였다. 이 방어선을 워커라인 혹은 부산 교두보 방어선이라 부르기도 한다. 교두보는 큰 하천을 사이에 둔 공방전에서 교량이나 도하장을 확보하기 위해 교량의 전단부나 대안의 도하지점에 구축하는 강력한 진지로 한국전쟁 당시 부산이 유엔군의 교두보 역할을 하였다. 당시 한국군 방어지역은 남한 면적의 약 10%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

전쟁 시 침략이나 방어를 위해 필요한 발판이 교두보인데, 그 교두보 역할을 대구에서 북방으로 22㎞ 떨어진 지점인 다부동이 했던 것이다. 적들이 사용한 무기 중 포(砲)의 사전거리가 10㎞여서, 만약 다부동에서 더 밀려나게 된다면 적들이 대구까지 포를 쏠 수 있는 거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다부동은 남북으로 국도 5호선[대구-안동]과 국도 25호선[대구-상주]이 통하고 서쪽으로 지방도 908호선[왜관~다부]과 이어져 있다. 서북편에는 유학산[해발고도 839m]이 북방으로 횡격실을 이루고, 동편으로 군내 최고봉인 가산[해발고도 902m]이 천험의 요새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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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부슈퍼 앞 도로

이 방어선이 돌파될 경우 10㎞ 남쪽의 동명면 도덕산[해발고도 600m] 일대까지 철수를 해야 하므로, 이렇게 되면 곧 대구가 북한군의 지상포화 사정권내에 들게 된다. 이 때문에 국군 1사단이 담당한 328고지유학산, 741고지, 902고지를 연결하는 약 20㎞의 방어선은 그야말로 최후의 보루였던 것이다. 또한 당시 한국의 지원군이었던 유엔군이 상륙하고 전쟁에 사용될 물자가 들어왔던 곳은 부산항이었다. 지원군과 물자가 들어오기에 안전한 곳이 부산이었다면 부산을 방어할 교두보의 위치로서도 다부동은 적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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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9고지탈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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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임시 수도인 대구를 방어하고 부산 교두보를 형성해야 한다는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다부동은 대한민국에서 꼭 지켜야 될 위치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당시 광복절을 맞아 대구에서 조선인민공화국 선포식을 거행할 계획이었던 김일성의 계획에 따라 북한군의 50% 이상이 대구를 공략하기 위해 집중된 상태였다. 당시 북한군은 제13사단, 제3사단, 제1사단, 제15사단 등의 군단 병력 21,000여 명이 투입되었다.

다부동에서 남한을 지키던 아군은 불과 7,600여 명이었다. 적군의 1/3도 안 되는 군사력과 무기로 다부동을 지키기에는 무리였던 걸까? 8월 18일 북한군 제15사단과 제3사단은 유학산으로, 제13사단은 중앙 계곡인 다부동 쪽으로 동시에 공격해 요충지인 유학산이 적에게 점령되는 등 위기를 맞았다.

바로 그 때, 이곳에서만큼은 후퇴할 수 없다고 여겼던 제1사단 백선엽 장군이 “만약 사단장이 물러서면 너희들이 나를 쏘고 너희들이 명령 없이 물러서면 내가 너희들을 쏘겠다.”며 유학산을 지켰다.

그렇게 해서 주야를 가리지 않고 하루에도 대여섯 번씩 유학산을 뺏고, 빼앗겼다고 한다. 적군들은 야간전투에 능했고 우리는 주간전투에 능했는데, 그 이유는 주간에 미군의 항공 지원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적군은 주간에 체력을 보충했다가 주로 야간 공격을 주 무기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던 중 8월 23일 미군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1개 사단이 3개 사단을 물리칠 수 있었는데, 이는 특히 적들은 가지지 못한 무기의 화력과 장비가 결정적인 도움을 준 것이다. 유학산 전투는 8월 13일에서 23일까지 가산면 다부동학산리 일대에서 제1사단 제11·12연대와 북한군 제1·13·15사단이 벌인 전투이다. 유학산과 그 동쪽 줄기인 837고지·790고지·674고지 일대는 해발 800m 이상의 분수령 능선이 동서로 4㎞나 뻗어 있는 험준한 고지로, 국도 5호선국도 25호선을 제압하여 대구를 공격하는 데 가장 유리한 발판이 되므로 다부동 결전장 제1의 요지라 할 수 있다. 국군은 공격 개시 이후 8일 동안 모두 9회의 탈환전 끝에 837고지 정상을 점령함으로써 다부동전투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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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0고지 방향 안내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