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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동네에서의 유년 시절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3E020301
분야 지리
지역 경상북도 칠곡군 기산면 각산1리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이순하

글 읽는 소리가 늘상 울려 퍼지던 선비마을 각산1리에서 1년 중 딱 하루, 아이들이며 부녀자들의 웃음소리가 담장 밖으로 새어 나가도 꾸지람을 듣지 않은 날이 있었다. 모든 것이 용인(容忍)되던 그 날은, 음력설을 새고 정월 대보름이 되기 전의 딱 하루였단다. 1년 중 제일 큰 행사인 명절을 보내고 정월 대보름이 되기 전, 그러니까 농촌사회에서는 농한기에 해당하여 부녀자들이 제일 한가한 시기이기도 했다.

그 날만은 조그마한 방에서 서른 명씩 모여 윷놀이를 하고, 아이들은 마음껏 바깥에서 뛰어놀 수 있었다. 어릴 적 연날리기며 맞대[자치기의 경상도 사투리] 등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는 장세완 씨는 그래서 더욱 명절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고 한다.

“‘무슨 맞대를 하노!’ 하고 혼나고. 맞대를 한 번도 안 해 봤다카이(니깐). 그리고 마을에 놀러를 가믄(면) 추석 때는 괜찮아요. 추석 때는 동산에 올라가서 달 보는 게 끝이고. 에는 지내고 나면 그때 열 살. 열한 살 때 작은집에 갔다가 잠이 드는 거에요. 자다 일나 보면 남의 집이거든요…… (골목 입구에서) 제가 신을 벗습니다. 양쪽에 들고 요즘 양말이 좋지 그때는 형편이 없었거든요. 발소리 나면 개가 짖거든요. 제가 어릴 적에 가만 섰습니다. 개가 짖으면 혹시 누구 어른들 ‘누(구)고?’ 소리 들을까 싶어가. 그래 그러니까 첨에 한두 번 고무신 신고 오다가 개소리 때문에 제자리 섰기 때문에 그 뒤로는 신을 들고 골목을 살살 그래가 집에 들어가가 양말만 싹 벗고 아무 데도 안 간 척하고 낑가가(끼어서) 잤다아이가(잤잖아).”

장세완 씨가 유일하게 마음 편히 놀 수 있었던 날이 설날이었는데, 친척집에서 친척 형들이며 이웃사촌들이 노는 모습만 바라보다 잠이라도 들어 버린 날이면, 어른들한테 들켜서 혼이 나지 않기 위해 몰래 집으로 돌아와야 했단다. 장년이 된 지금도 장세완 씨는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면서 집안 어른들에게 혼이 날까 조마조마했던 그때의 기분을 느끼는 듯했다.

“미나리깡(미나리를 심은 논)에서 한 둘이가 스케이트를 탑니다. 그래 우리가 옆에서 보면 저는 그걸 몬(못)하구로 했어요. 요 미나리깡 그게 요 부근에서 제일 넓었습니다. 그래가 딴 마을 아들도 타러 왔습니다. 그래가 대여섯 대가 왔다갔다합니다. 그라면 우리 집안 아제들 중에서 타고 싶은 아제들이 있거든요. 그라면 ‘야~ 큰집 할배 오신다’ 그카(러)면 스케이드 그 타다, 타는 놈이 내뺍니다. 그라다가 내뺀 거를 탑니다. 그라다가 내뺀(도망간) 놈이 저 뒤에서 보고 ‘어디고?’(하고 돌아보고는) 내가(장세완) 타고 있으니깐 ‘니(장세완) 맞아 죽는데’ 했다니깐요. 그만큼 엄하게 컸어요.”

종손이다 보니 어릴 적부터 집안에서 ‘대장’이니 ‘집안의 기둥’이니 하는 말을 듣고 자란 장세완 씨는 발걸음 하나, 말투 하나에서 집안의 허물을 보일까 항상 행동거지를 조심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어린 시절 스케이트 한번 마음 편하게 타 본 적이 없었다고 장세완 씨는 수줍게 웃음을 보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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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를 하는 장세완 씨

[정보제공]

  • •  장세완(남, 1951년생, 각산1리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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