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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치마을 인동장씨 막내둥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3E030301
분야 지리
지역 경상북도 칠곡군 기산면 각산1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최엄윤

2009년 현재 서치마을에는 인동장씨네가 종갓집까지 해서 너덧 집이 있다. 그 서치마을에서 장상문 옹은 종갓집 7남매의 막내로 태어나 어른들의 귀여움을 많이 받고 자랐다고 한다.

“7남맨가 그랬는데, 끝이라노니께 우리 누님이 나보다 일곱 살 더 먹었는데, 작년에 돌아가셨는데 장(늘) 업고 댕겼어, 날. …… (중략)…… 쪼맨할(어릴) 적에 귀염 받았지, 나는 막내고 이래 노으니께(이러니까), 전부 어른들이고…… (중략)…… 나는 옷 하나 나쁘게 안 입고 비단 떠가지고 귀엽다고 그랬지, 나는 제일 호강하고 컸어.”

하지만 그렇게 귀여움을 받았던 어르신도 일제강점기에는 가난을 면치 못하여 소나무 껍질과 산에서 뜯어 온 나물죽도 모자라서 물로 배를 채워야 했다. 그러다 해방이 되면서 차츰 형편이 나아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해방이 되고 몇 년 후 장상문 옹은 스무 살 되던 해 가마를 타고 성주로 장가를 갔다. 장가가서 1주일간 처가에서 지내고, 색시는 1년간 친정에 두고 무슨 일이 있을 때 몇 번 처가에 가서 새색시 얼굴을 봤다. 당시까지도 양반 가문에서는, 시가에 살림도 없고 급하게 어른을 모셔야 하는 경우가 아니면 보통 ‘1년 묵힌다’고 해서 결혼 후 신부가 친정에서 1년 정도 머물던 풍습이 있었다.

“양가가 다 넉넉하고 이카면(이러면) 한 해씩 묵하(둬), 놔두면 죽 놀다가, 이자 평생을 친정 가서 못 놀거든, 그래 놀 때는 놀고 배울 때는 배우고…… 이전엔 베를 많이 짰다 말이야, 삼베나 무명이나 이렇게 짜는데 거기서 베를 짜는 것을 배우고 반지르(바느질) 겉은 거 배우고 음식 하는 거 친정에서 배워가 오는 거지, 그러면 시집 와도 다 잘하지…….”

장상문 옹은 당시를 회상하며, 처음에 결혼이 좋은지 어떤지 그저 부끄럽기만 했는데, 1년 사이 몇 번 신부를 보고 오니 점점 보고 싶어졌단다. 그런데 신부가 오자마자 6·25전쟁이 터져서 군대에 갔다. 전쟁 중이라 군에 가자마자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바로 6사단이라는 곳으로 편입되어 평안도까지 가서 싸우고 후퇴하고 싸우고 후퇴하고, 압록강을 건너 중공군 포로로 잡혔다가 풀려나고, 그렇게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고 천행으로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와서 이탠강(2년인가) 있다가 애를 낳았지, 나는 여 하도 폭격을 해쌌고(하고) 해서 다 죽었지, 고향이 하나도 없는 줄 알았어. 전부 폭격을 다 맞고 내가 살아 봐야, 고향에 가 봐야 아무도 없을기고(없을 것이고) 다 절단난 줄 알았지. 와보이 조부도 살았고 다 계시, 그래 우리 색시도 살았는가 우옛는가(어쨌는가) 물어 보이 저 친정에 가 있다카데…… (중략)…… 그 기별이 우예(어떻게) 들었는가 왔데, 우리 장모하고 둘이 와가지고. 그래 득실넘지(좋지), 반가워 가지고…… 허허허, 죽은 사람이 살아 왔으니께…… 그때 간 사람이 다 죽었거든, 산 사람은 우예다(어쩌다) 몇이 살았지.”

인동장씨의 종갓집 막내둥이로 귀여움을 받으며 자랐으나, 격동의 세월 가운데 천행으로 살아남은 장상문 옹은 현재 서치마을에서 벼농사를 지으며 이웃들과 친형제처럼 지내며 살아가고 있다.

[정보제공]

  • •  장상문(남, 1929년생, 각산1리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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