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05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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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鋼 |
영어음역 | Jo Ga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병희 |
성별 | 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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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훈 | 정려(旌閭) |
생년 | 1527년 |
몰년 | 1599년 |
본관 | 한양(漢陽) |
자 | 숙거(叔擧) |
호 | 모계(慕溪) |
아버지 | 조승윤(趙承胤) |
어머니 | 조황(趙璜)의 딸 평양조씨 |
추증/추서 | 좌승지(左承旨) |
[정의]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의병장.
[가계]
본관은 한양(漢陽)이며 자는 숙거(叔擧), 호는 모계(慕溪)이다. 조순생(趙順生)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조승윤(趙承胤), 어머니는 조황(趙璜)의 딸 평양조씨이다.
[활동사항]
처음 정사현(鄭思顯)에게 글을 배웠고, 뒤에 성제원(成悌元)과 송인수(宋麟壽)[1487~1547]를 사사하였다. 성리학(性理學)에 통달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여 일찍이 어머니의 병에 들오리(野鴨) 생각이 난다 하나 때마침 한 여름이라 구하기 어려웠다. 이에 걱정만 하고 울고 있었는데 창졸간에 새매가 오리를 그의 앞에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곧 어머니께 드리니 병환이 나았다.
1563년(명종 18) 학행으로 목사 이증영(李增榮)이 천거하였다. 1568년(선조 1)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이듬해 성균관에 들어가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1570년 청주의 유림들과 합의하여 신항서원(莘巷書院)을 창건하였다.
1579년 영릉참봉(英陵參奉)으로 부임하였으며, 이듬해 내자시봉사(內資寺奉事)가 되었다. 1586년 사옹원직장(司饔院直長) 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를 거쳐 사헌부지평이 되었다. 이후 은진현감으로 나갔다가 얼마 뒤 사헌부집의가 되었다.
임진왜란에 선조(宣祖)가 북으로 피난 간 소식을 듣고 창의(倡義)하여 청주 송령(松嶺)에서 왜적를 무찌르는 공을 세우니, 나라에서 창의사(倡義使)의 호칭을 내렸다. 1593년 다시 의병을 일으켜 호서(湖西)를 진정하였다.
1598년 왜적이 아직 등쌀 대므로 미태(米太) 2천 곡(斛), 정철(正鐵) 2천근을 모아 군수(軍需)에 이바지하였다. 이때 국치(國恥)를 씻지 못한 것은 자기의 죄라고 자책한 상소가 야사(野史)에 보인다. 문인(門人)과 자서(子婿)가 동시에 의거하여 세칭 일문육창의(一門六倡義)라 하였다.
[저술]
저서로 『모계집(慕溪集)』이 있다.
[상훈과 추모]
현종 조에 충효(忠孝)로 정려(旌閭)되었고, 좌승지(左承旨)를 내렸으며, 어필로 ‘충효절의(忠孝節義)’ 네 글자를 써 주었다. 숙종 때에 송천서원(松泉書院)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