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1371 |
---|---|
한자 | 朴敏雄 |
영어음역 | Park Minu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용만 |
성별 | 남 |
---|---|
생년 | 1674년 |
몰년 | 1732년 |
본관 | 순천(順天) |
자 | 사호(士毫) |
호 | 서호산인(西湖山人) |
출신지 | 청주 |
[정의]
조선 후기의 무신. 창의사.
[가계]
본관은 순천(順天)이며, 자는 사호(士毫), 호는 서호산인(西湖山人)이다. 박민웅(朴敏雄)은 부사 박원진(朴元震)의 손자이다.
[활동사항]
도량과 재간이 뛰어나고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하여 소년 때부터 이름이 났다. 뒤에 장붕익(張鵬翼)과 이봉상(李鳳祥)[1676~1728]이 각각 국사(國士)로서 조정에 천거하였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 등이 반란(무신란)을 일으켜 충청병사(忠淸兵使) 이봉상과 영장(營將) 남연년(南延年)을 죽이고 청주성을 함락하자, 서울에 있다가 반란의 소식을 듣고는 급히 고향에 돌아와 군사 수백인을 모집, 반적(叛賊)의 토벌에 나서 대신들의 추천으로 충청병마우후 겸 창의사(忠淸兵馬虞候 兼 倡義使)로 임명되어 신천영(申天永) 등 20여인의 목을 베어 조정에 올렸다.
이어 이인좌와 사전에 치밀한 모반계획을 세운 바 있는 정희량(鄭希亮)이 경상도의 안음(安陰), 거창, 합천 등지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다시 상주영장 겸 영남창의사(尙州營將 兼 嶺南倡義使)에 임명되어 반란군을 진압하고, 곧 인수(印綬, 조선시대 병조판서나 군문의 대장 등 병권을 가진 관원이 병부 주머니를 차던, 사슴 가죽으로 된 끈)를 풀고 돌아왔다가 조정의 명령이 없이 임지를 무단이탈하였다는 죄목으로 고향에 잠시 유배되었다.
그 뒤 해미현감(海美縣監)을 거쳐 창성부사(昌城府使)가 되고, 1732년 강계부사에 임명되어 창성에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