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18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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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鍾五 |
영어음역 | Kim Jongo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양수 |
[정의]
군인.
[가계]
충청북도 청원군 부용면 외천리에서 김성균(金成均)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생애]
일본 주오(中央)대학 재학 중 1944년 학도병으로 입대, 소위로 임관되었으나 일본의 패망으로 귀국하였다. 국방경비대에 1946년 입대, 1947년 제1연대장이 되었고, 한국동란 때는 제6사단장으로 참전하였다.
그 후 육군사관학교 교장, 국방부 합동참모본부총장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1961년의 5·16군사정변 후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을 거쳐 제15대 육군참모총장에 취임하였다. 1962년에 육군대장이 되었고, 다음 해에 합동참모회의 의장을 지냈다.
[활동사항]
제6사단장으로 참전하여 춘천, 홍천 방면으로 공격해오는 북한 공산군의 진격을 5일간이나 지연시킴으로써, 공산군의 남한 진공계획을 저지하였다. 충청북도 음성에서는 북한공산군 15사단 48연대를 기습하여 사살 1천명 등, 개전 이래 최대의 전과를 올렸고, 충주-이화령으로의 지연전을 효과적으로 실시하였다. 같은 해 9월 낙동강방어선 신녕지구에서 적에게 큰 타격을 주어 반격작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 후 김종오(金鍾五)[1921~1966] 사단은 10월 26일 초산을 점령, 한·만 국경에 최초로 태극기를 꽂았다. 북진작전 중 부상으로 제9사단장으로 전보된 다음, 육군본부 인사국장 등 요직을 역임하였다.
1952년 제9사단장으로 임명되어, 중공군 정예사단들과 백마고지를 두고 10일간 24번이나 계속된 뺏고 빼앗기는 혈전을 지휘하였다. 이 전투 끝에 중공군을 완패시킴으로써 휴전회담에도 큰 정치적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