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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300240
한자 架山鎭管
영어의미역 Gasanjingwan, Locality Defense System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경상북도 칠곡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최인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정연도/일시 1640년 4월연표보기
시행처 비변사

[정의]

조선 후기 가산산성에 설치되었던 지역 방위제도.

[개설]

가산진관가산산성에 설치되었던 지역 방위체제이다. 가산산성은 지금의 경북 칠곡군 가산면 가산리, 동명면 남원리에 걸쳐 있으며, 험준한 한 산지에 위치하고, 남북으로 대로와 접해 있어 내륙 방어의 요충지였다. 1640년(인조18) 내성을 쌓고, 1700년(숙종 26) 외성을 쌓았으며, 1741년(영조 17)에 중성을 쌓았다. 성안에는 칠곡도호부가 위치하고 있었는데 험준한 산성 안에 읍치가 있어 백성들이 불편해 하였으므로 읍치를 팔거현[현재 대구광역시 북구 읍내동]으로 옮긴 후 이곳에 종9품 별장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가산진관에 예속된 군현으로는 의흥, 신녕, 군위, 하양 등이 있으며 군현의 군수창고가 성내에 있었다. 그리고 외성 안에는 1701년 경상감사의 명으로 건립하여 승창미(僧倉米)를 보관하던 천주사가 있었다.

[제정경위 및 목적]

가산산성은 일본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에서 축성되었다. 1638년(인조 16) 2월에 경상도 감사 이경증(李景曾)이 사직할 때 인조가 불러 일본의 정세에 대한 의견 교환과 더불어 어유산성(御留山城)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이경증은 영남의 산성으로 인동에 천생산성이 험준하여 최상이나 지세가 험준하여 백성이 견디지 못하고, 어유산성은 유성룡이 지리적 이점이 있음을 지적하였으나 백성들이 곤궁하고, 재정이 다하여 역을 일으키기 어렵다고 하였다. 같은 해 3월에 동지 이경여(李敬輿)가 상소하여 어유산성의 축성을 건의하였다.

왜적의 방어를 위하여 경상도에 산성을 수축할 필요성이 인식되는 가운데 이명웅(李命雄)이 1639년(인조 17) 4월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하였다. 이명웅은 왕에게 경상도 지역에서 왜적의 방비를 위한 성지(城池)가 갖추어지지 못하였음을 다시 아뢰었다. 이에 인조가 성을 쌓을 만한 곳을 조사하여 보고하라는 명을 내렸다. 대구로 부임한 이명웅팔거현가산(架山)이 지리적으로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음을 들어 성의 축조를 건의하였다.

왕의 허락을 얻은 이명웅은 1639년(인조 17) 9월에 축성 공사를 시작하여 1640년(인조 18) 4월에 가산산성의 내성을 축조하였다. 가산산성이 축조되자 종래 성주목에 속해 있던 팔거현(八莒縣)을 나누어 가산산성읍을 정하고 칠곡(漆谷)이라고 명명한 후 칠곡도호부를 설치하였다. 초대 도호부사로는 윤양(尹瀁)이 1640년(인조 18) 7월에 부임하였다. 칠곡도호부사는 3품 무관으로 대구진관 병마동첨절제사 가산성장(大邱鎭管 兵馬同僉節制使 架山城將)을 겸하였다.

[관련기록]

가산산성, 가산진관, 칠곡도호부 등과 관련된 기록은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팔거현, 『칠곡부읍지(漆谷府邑誌)』도호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성주목 팔거현조, 『서애문집(西厓文集)』, 『징비록(懲毖錄)』, 『기언(記言)』, 『인조실록(仁祖實錄)』, 『순조실록(純祖實錄)』,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관찰사이공영세불망비 비각 현판 등에 나타난다.

[내용]

가산진의 병력규모와 주요시설물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병고 주군병 산성조에 의하면 칠곡도호부사 겸 병마동첨절제사인 가산수성장이 거느린 병력은 내외첩작령군(內外堞作領軍官) 1541명, 성정군(城丁軍) 18초(哨), 아병(牙兵) 20초(哨), 모민작대(募民作隊) 1초(硝) 73정(丁), 대포수 50명, 표하수솔군병(標下隨率軍兵) 182명, 당보군(塘報軍) 60명, 치중군(輜重軍) 29명, 승군(僧軍) 294명으로 되어 있다. 가산산성의 시설물로는 동포루, 서포루, 남포루, 북포루, 장대, 진남대 등의 관액과 남창, 가산영창, 가산진속읍군창[군위창, 의흥창, 신녕창, 하양창], 빙고, 장적고, 내성군기고, 외성군기고, 외북창 등의 창고와 동문루, 남문루, 위려창, 운주헌, 찬주헌 등의 누정(樓亭)이 있었다.

[변천]

가산산성을 축조한 경상도 관찰사 이명웅은 철저한 기강의 확립과 축조 과정에서 많은 인명의 손실이 있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이임하였다. 이로 인해 국방상의 요충지임에도 불구하고 가산산성에 대한 논의가 중단되면서 10여년이 지나자 상당 부분 훼손을 면치 못하였다. 또한 창성 당시의 미비한 점들도 상당수 드러나게 되었다. 이에 6대 칠곡도호부사 이지형(李枝馨)이 경상감사 이만(李曼)과 의논하여 승려와 군병을 동원하여 백성들 모르게 성을 불과 수개월 만에 중수하였다. 중수로 100여 간의 건물과 포루 등을 건조 하였다. 목조 건물은 퇴락을 막기 위하여 더욱 견고하게 하였고, 남쪽으로 곡성(曲城)을 두어 방비를 강화하였다. 중수를 통해 성의 규모가 처음 둘레 3830보, 여장(女墻) 1752첩(堞)에서 둘레 4710보, 여장(女墻) 1877첩(堞)으로 변경되었다.

한편 1700년(숙종 26) 관찰사 이세재(李世載)가 외성을 축조하였다. 외성은 석축으로 둘레 3754보, 여장(女墻) 1890첩(堞), ‘영남제일관(嶺南第一關)’이라 제액한 누(樓)가 있는 성문 1곳, 북·동·남쪽의 3개 암문과 남·북문 밖에 별도로 곡식을 보관할 수 있는 두 개의 창고를 두었다. 이후 1741년(영조 17)에 관찰사 정익하(鄭益河)가 다시 외성을 축조하였다. 외성은 석축으로 둘레 602보, 여장(女墻) 402첩(堞), 성 문루 1곳으로 이루어졌다. 1640년(인조 18) 가산산성의 축조와 더불어 성안에 설치된 칠곡도호부는 험준한 산간에 읍치가 있어서 군량의 수송 등 여러 가지로 불편한 점이 많았다. 이에 읍치를 옮기자는 논의가 일찍부터 있어왔으나 100여년이 지나도록 실현되지 못하다가, 1819년(순조 19) 5월에 이르러 비변사의 논의를 거쳐 팔거구읍[현재 대구광역시 북구 읍내동]으로 옮겼다. 이에 앞서 1811년(순조 11)에 가산산성이 영남의 거진으로 관방의 중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훈련이 충실하지 못하다는 논의가 있어 전주 위봉산성(威鳳山城)의 예에 따라 별장(別將)을 두게 되었다. 이에 따라 1820년(순조 20) 이후로는 가산산성의 방어를 가산진 별장이 담당하게 되었다.

[현황]

가산진관이 설치되었던 가산산성은 1971년 3월 26일 사적 제216호 지정되어 정비되었으나 성 내에 설치되었던 가산진관은 해체되어 남아있지 않다.

[의의와 평가]

가산진관가산산성 내에 설치된 조선 후기의 군사 체제이자 제도이다. 왜란(倭亂)과 호란(胡亂)의 두 국난을 겪은 후 국방력 강화의 일환으로 설치되어 국방상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였다는데 의의가 있다. 또한 가산산성의 축조 과정과 가산진관의 설치 과정을 통하여 조선 후기 국방 정책의 한 부분을 파악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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