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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300286
한자 玄風郭氏雙烈碑
영어의미역 a Pair of Memorial Shrine for Lady Hyeonpung Gwak Clan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심천리 산58-1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최인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열녀비
양식 이수형
건립시기/일시 1642년연표보기
관련인물 현풍곽씨|광주이씨
높이 168㎝
너비 50㎝
소재지 주소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심천리 산58-1[심천]지도보기

[정의]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심천리에 있는 조선시대 현풍곽씨광주이씨의 열행비.

[건립경위]

심천리 현풍곽씨 쌍렬비이심옥의 부인 현풍곽씨현풍곽씨의 딸인 광주이씨의 열행을 기리기 위하여 1642년(인조 20)에 응교 이도장이 비문을 지어 세웠다. 원래 현풍곽씨가 투신한 낙화담이 있던 신리 웃갓마을에 건립되었으나 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세웠다.

현풍곽씨는 사인 곽헌의 딸로 광주인 도사 이심옥의 아내이다. 부인은 평소 품성이 단정하고 몸가짐이 엄정하여 친척과 노복이라도 얼굴을 보기가 드물었다. 임진왜란 때 남편을 따라 산중에 숨었다가 왜적들에게 붙잡히게 되었다. 적병이 칼로 위협하면서 데려가려 하였으나, 현풍곽씨는 얼굴을 가리고 땅에 주저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왜병이 칼로 팔을 쳐도 움직이지 않고, 허리와 배를 찔러도 움직이지 않자 왜병들이 버리고 갔다. 가족이 달려가서 구원하였으나, 14일 만에 운명하였다.

또한 현풍곽씨의 딸인 광주이씨곽재기에게 출가하였는데, 난리가 나기 전에 근친 왔다가 친정 식구를 따라 피난을 하였으나, 적병을 만나 욕을 면할 수 없음을 알고 높은 암벽으로 달려가 뛰어내려 물에 빠져 죽었다. 이와 같은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왕명으로 정표하였다.

[위치]

심천리 현풍곽씨 쌍렬비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심천리 산 58-1번지, 심천마을을 조금 못 미친 오른쪽 산자락에 있다.

[형태]

현풍곽씨 쌍렬비는 완만한 경사지에 네모의 벽돌담을 두르고 안에 맞배지붕의 비각을 건립한 후 비석을 세웠다. 비석은 비좌와 비신, 지붕[가첨]을 갖추고 있는데 지붕은 비신과 한 돌로 제작하였다. 지붕과 비좌에는 연꽃 봉오리와 연잎 무늬를 부조하여 장식하였다. 비신은 88㎝, 너비 50㎝, 두께 12㎝이며, 비좌는 높이 29㎝, 너비 75㎝, 두께 46㎝이다. 지붕은 높이 51㎝, 너비 77㎝, 두께 15㎝로 전체 비석의 높이는 168㎝이다. 비신의 앞면에 “쌍렬비(雙烈碑)”를 가로로 새기고, 쌍렬비를 세우게 된 경위와 내용을 세로로 새겨 넣었다. 비문은 광주인 응교 이도장(李道長)이 지었다.

[금석문]

현풍곽씨 쌍렬비의 금석문은 다음과 같다.

"雙烈碑

廣陵故權管李公諱心玉有妻曰郭氏苞山士人郭헌(走+憲女)稟性端莊守己嚴正

親戚奴僕亦罕見其面萬曆壬辰之變從夫匿山中爲賊所獲賊拔劒㤼之欲

將去郭手遮面據地割臂不動刳頭面不動剖腰背又不動賊以爲死置之而

去家人馳援越十四日而終臨死奄奄之際亦不露肌體以示人有女適玄風

郭再祺先兵來省仍從避寇後一月値賊猝至度不免自投千仞岩赴水死焉

非閭門禮防有素於平日豈能臨急自樹立若是其卓卓耶事聞

命旌其閭于司議元雨氏立石其傍表曰雙烈碑請余爲記噫曠世貞節輝暎

一家至今五十餘年有口者嘖嘖如昨日事吾固知石可毁而名不可滅矣何

待吾之言顧吾於權管公爲族孫其淑行懿烈聞於父兄宗族者不啻親目而

司議之請又不可以孤焉則竊幸附名於其間忘其固陋而書之如左云族孫

通訓大夫前行司諫院司諫知製敎李道長識

壬午五月  日立"

[현황]

비각이 있고, 잘 정비되어 보존 상태가 좋다. 그러나 비문을 새긴 부분에 검은 이물질을 채워 넣었는데 시일이 지나면서 이것이 들뜨고, 일부 탈락되면서 읽을 수 없는 글자들이 일부 있다. 전통 시대 유교적 사회질서를 잘 보여 주는 자료로 평가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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