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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301909
한자 漆谷山河-詩人具常-具常文學館
영어의미역 Poet Gu Sang, The House of Gu Sang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지도보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광수

[정의]

경상북도 칠곡군에 본적을 두고 칠곡의 산하와 더불어 산 원로시인 구상구상 문학관.

[구상의 출생과 칠곡의 인연 ]

“아침 강에/안개가/자욱 끼어 있다./피안(彼岸)을 저어가듯/태백(太白)의 허공 속을/나룻배가 간다./기슭, 백양목 가지에/까치가 한 마리/요란을 떨며 날은다./물밑의 모래가/여인네의 속살처럼/맑아온다./잔 고기떼들이/생래(生來)의 즐거움으로/ 노닌다./황금의 햇발이 부서지며/꿈결의 꽃밭을 이룬다./나도 이 속에선/밥 먹는 짐승이 아니다.”(강1)

이 시를 읊고 있노라면, 구상 시인이 정착하여 본적지로 삼은 칠곡군 왜관의 관수재(觀水齋)에서 강물을 바라보며 아침을 여는 시인의 삶이 그림처럼 떠오른다. 안개 짙은 강기슭, 백양나무 가지의 까치 한 마리, 맑게 비쳐 오는 여인의 속살 같은 강물! 이 모두가 잔잔한 시상(詩想)이 되어 시인의 삶 속에 시어(詩語)를 우려내기에 가장 적합한 요새(要塞)가 되고 있다. 도시 생활에 물들어 있던 구상 시인이 어떻게 되어 이곳 시골 칠곡군을 본적지로 삼고 20여 년간 생활하게 되었을까? 그 연유를 파악하기 위해 시인의 과거사로 잠시 회귀(回歸)해 볼 필요가 있다. 구상 시인의 태생지를 혹자는 함경남도 원산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이는 잘못 알려진 기록이며 실은 서울 태생이다. 구상의 아버지가 쉰, 어머니 마흔 넷일때 1919년 서울 이화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가 그를 잉태했을 때 사슴이 와서 어머니의 무릎 언저리를 꼭 물어주는 태몽을 보아서 그를 애물단지라고 말씀하신 어머니의 술회가 어릴적 어머니의 속을 썩이던 일을 회고할 때마다 순간순간 그의 뇌리에 스며들었다. 유별하신 노부모의 사랑과, 고마움을 모르고 엇가기만 했던 유년 시절이 후회되기도 했다. 시인이 네 살 되던 해 베네딕도 수도원의 교육 사업을 위촉 받은 아버지 구종진을 따라 함경남도 원산에 갔고 거기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구상이었다. 그러다가 6·25전쟁으로 인하여 대구로 피난하여 휴전 시까지 국방부 기관지 『승리일보』를 주재하다가 『영남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있게 되었는데 시인의 평소 고질병이던 폐결핵이 재발하여 입원 치료 하는 등 건강이 부실하여 도시 생활이 도저히 체질에 맞지 않았다. 때마침 함경도 원산 교외 덕원에 있던 독일계 성베네딕도 수도자들이 감금되어 있다가 휴전 후 국제적십자사의 꾸준한 노력 끝에 감옥에서 풀려 나 본국으로 돌아갔는데 그 중에서 몇은 다시 돌아와서 우리나라 천주교 대구교구 소속지인 왜관에다 수도원을 설립하게 된다. 그러므로 덕원대수도원을 옮긴 자리가 왜관 성베네딕도 대수도원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구상은 아내와 함께 친정 같은 왜관수도원 이웃에 이사하기로 결정하게 된다. 구상이 왜관에 본적지를 둔 또 다른 이유는 혹여 북에 있던 가족이 내려오더라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왜관 관수재(觀水齋)와 아내 서영옥 여사]

1967년 1월에서 4월 말까지 구상 시인의 연작시 「밭 일기」가 주간한국에 100편이나 연재되었고 1970년에 들어서면서 강(江)시 40여 편이 연재되었다. 이는 구상 스스로의 어릴 적 추억을 회상하며 쓴 시도 있었지만 칠곡의 수도원 농장들과 바로 집 앞 나루터인 낙동강 변에서의 삶이 대부분의 소재가 되었다. 시대 상황이 물질주의와 현실주의로 치닫는 것에 대한 비판으로 「까마귀」란 우유(寓喩)로 연작이 펼쳐져 나왔다.

구상 시인의 문학적 감수성은 6·25전쟁 전후의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삶의 이상과 꿈을 연결해주는 강물의 흐름을 늘 주시하며, 강에 대한 상념이 강렬하게 작용한 때문인지 낙동강은 그의 연작시의 소재가 되었다. 시인에게 있어 강은 그냥 강이 아니라 「그리스도 폴」이라는 성인의 전설 곧 5세기 스페인 사람 폴이 원래 깡패였지만 강가에 사는 은자(隱子)를 만난 뒤, 사람들을 업어 강을 건네주다 결국 사랑의 화신인 예수를 만났다는 이야기와 헤르만 헤세의 소설 『싯달타』(부처님의 전기 중에 ‘고타마’와 ‘싯달타’ 중 세속의 삶을 동경하며 살아간 싯달타의 이야기)를 접하고부터 ‘강’은 그에게 회심의 수도장으로 시상을 떠올리는데 주제가 되었다.

구상의 고명 딸 구자명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버지께서 강나루로 걸어가시는 뒷모습을 보았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강나루에 묶인 나룻배 뱃전에 올라 우두커니 강 맞은편 마을을 바라보실 때도 있고, 때로는 뱃전에 쪼그리고 앉아 낚싯대로 고기를 낚아 올리듯 한 자세를 취할 때도 있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중절모를 쓰시고 뱃전에 우두커니 서 계신 모습은 마치 선객들을 강 저편 산 너머로 배웅하시는 것처럼 보였고, 뱃전에 쪼그리고 앉아 계신 모습은 고기를 낚아 올리는 낚시꾼의 모습 이었는데 어린 제 맘속에 생각하기를 아마 고기 대신 아버지께선 시어(詩語)를 낚고 계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의 시는 강물이 흘러가듯 삶과 죽음의 경지를 초월하여 영원 속으로 흐르는 불멸의 시라고 생각 합니다” 그렇다. 구상에게 있어 왜관은 자신을 풀어내는 시요, 시제로 많이 사용했던 낙동강이 흐르는 곳. 그래서 퍼내고 또 퍼내어도 마르지 않는 샘물 같은 생수의 시다. 병색이 짙었던 구상의 청년기에 생명줄을 이어준 아내 서영옥 여사는 그의 구도자적 시의 원천이기도 했다. 구상에게 시(詩)는 왜관에 흐르는 강(江)이요, 왜관은 곧 아내다. 구상 시인은 관수재에서 서영옥 여사와 달콤한 밀월 사랑을 나누고 단란한 가족들과 정담을 나누었다. 특히 그의 아내는 아픈 남편을 간호한 수호천사였다. 부인과 구상 시인과의 약혼설이 오갈 무렵 구상 시인은 폐결핵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몸상태가 결혼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기에 약혼녀에게 절연의 통고문을 내고 마식령에 있는 천주교회 소속 산장에 전지 요양을 떠났다. 그리고는 그 해 8월 15일 성모승천대축일을 지내기 위해 덕천 집으로 돌아왔다. 이때 약혼녀는 구상을 찾아 나섰으나 서로 길이 어긋나 기진맥진하여 돌아왔을 때 우연히 만나게 되고 그 반가움과 감격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결혼하게 된다.

서영옥 여사는 구상 시인의 형인 구대준 신부가 주임신부로 있었던 흥남천주교회에서 운영하던 대건의원에서 의사로 근무하던 중 구상 시인과 결혼하였다. 구상 시인은 결혼 후에도 수차 경제적인 위기와 악화된 병세로 인해 고전을 면치 못했는데 부인 서영옥 여사의 지혜로운 도움으로 이를 극복할 수가 있었다. 6·25전쟁 이후에도 대구 피난처에서 두 번이나 각혈을 하고 병원 신세를 졌다. 그 때마다 부인은 직업을 갖기도 하고 개업도 했지만 마침내 구상 시인과 아내 서영옥 여사는 왜관 수도원 부근에 그 당시 시가 7만 원짜리 초가집 한 채가 포함된 5백 평의 땅을 사게 되었고 수도원 건축 책임자인 명용인 수사가 직접 지휘하고 감독하여, 서영옥 여사가 일할 순심의원을 짓고 사랑채를 지었는데 그 당시 구상과 교분이 두터운 문우(文友)였던 파성(巴城) 설창수(薛昌洙) 시인이 사랑채를 ‘관수재(觀水齋)’라 당호를 지어 주었다. 또 진주 촉석루의 현판을 쓴 이름난 서예가 은초(隱樵) 정명수(鄭命壽) 선생이 ’관수세심(觀水洗心)‘이란 제의(題意)를 써 보내기도 했다. 관수세심이란 ’물을 보고 마음을 씻는다‘는 뜻인데 곧 관수재의 당호와 일맥상통하며, 자기 고백적인 성찰의 시를 많이 썼던 구상의 문학세계를 뜻함이기도 했다. 관수재는 정양소라 부르기도 했는데 시인의 문학 활동을 도와 준 아내의 정성이 담겼던 뜻 깊은 장소이다. 그래서 시인의 여의도 시범아파트 11층 서실 현관에도 ’관수재‘란 자그만 서각 편액을 걸었다고 한다.

[고명딸 구자명]

고명딸 구자명이 초등학교 2학년 시절에 부인 서영옥 여사는 일본 동경의 결핵전문병원에서 1년 넘어 입원 해 있는 남편에게 막내딸이 그린 초상화를 생일 선물로 보내기 위해 딸 자명에게 그림을 그리게 했는데 당시엔 일반 가정에서 가족의 독사진 같은 것을 변변히 갖추고 사는 시절도 아니어서 기라성 같은 우리 문화계의 인물들인 지인(知人)들과 함께 찍은 단체 사진 몇 장을 제외하고는 참고할 자료랄 것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버지 구상은 늘 손님 같은 존재로서 가족과 힘께 지낸다고는 하지만 외국에 나가거나 아니면 문인들과의 모임 때문에 왜관 집 사랑채에 묵으시다가 바람처럼 떠나는 것이어서 대구 등지에서 지인들이 몰려오면 이따금 잔심부름할 때만 아버지 얼굴을 보는 정도였다. 그러다가 아버지는 결국 각혈을 하고 1년 간은 서울 집에 몸 져 누웠다가 일본으로 떠났기에 아버지 얼굴을 그리기가 쉽지 않았다.

아버지 얼굴을 그려 보려고 눈빛처럼 새하얀 도화지를 꺼내어 여러 장을 버리는 중에도 아버지를 닮은 얼굴이 나오지 않았다. 어머니가 아무거나 한 장 그려 보내자고 해도 싫다고 도리질 치며 속이 상해 울다 잠이 들었다. 한참을 누웠다가 잠이 깨어 보니 추석을 앞 둔 때라 보름달이 둥글게 떠올라 아버지 얼굴 같은 느낌에 도화지와 크레용을 찾아 보름달을 그리기 시작했다. 도화지에 가득 차게 샛노란 색깔로 달을 그려 놓고 밤 하늘색을 보랏빛으로 배경을 칠해 놓고 보니 그 그림이 너무 만족스러워 그걸 일본에 부치게 했고 아버지는 일본에서 어린 딸이 그린 자신의 초상화를 보고 매우 기뻐하며 같은 병동의 환우들과 간호사들에게 크게 자랑했다고 어린 딸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어쨌든 구상 시인의 삶 속에 깃든 영혼의 빛과 문학의 등불이, 비록 자주 만나지 못하던 어린 딸에게 둥근 달빛과 같은 어진 아버지의 인상을 주었음이 증명되고 있다. (구자명의 수필 ‘아버지의 얼굴’ 중에서 발췌)

[구상의 인맥과 인품]

“건너 모래톱에/말뚝만이/홀로섰다/낚싯대 끝에/잠자리가 조은다.

멀리 철교 위에서/화통차(火筒車)가/목쉰 소리를 낸다.

풀 섶에 갓 오른/청개구리가/물끄러미 바라본다“(강7)

시인의 강은 일반적인 조망으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시심의 포착인 것으로 심회의 한가락을 술회하고 있다. 그냥 단순한, 일반적인 관심으로 강을 바라봄이 아닌 깊은 관찰이다. 강을 오랫동안 관찰하고 바라 본 소위 관입실재(觀入實在)의 소산이라 여겨진다. 아지랑이 아물거리는 강을 바라보며 강나루에 전설처럼 남겨진 옛날 나루터 말뚝과 낚싯대 위에 졸고 있는 잠자리, 멀리 왜관철교 위에 목 쉰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화통차, 칠곡의 산하에서만 볼 수 있는 6·25전쟁 최후 보루의 아픈 전쟁 역사와 천주교 대교구인 왜관수도원의 풍경... 구상이 삶과 죽음의 갈림길을 오가며 작품을 썼던 우주와 존재론의 형이상학적인 시의 문체가 구상의 살아 온 배경과 인품과 그의 시학에 절묘하게 상통하는 느낌을 준다. 구상은 자신의 시에 대해 스스로 평하기를 “심지어 전쟁에도 당위가 있고, 전략적 가치가 있어, 하지만 나는 그런 것들을 따지지 못해. 나는 나의 본명이 상준(常浚)인 것처럼 인류의 보편성, 보편적인 선악의 문제, 존재론적, 형이상학적 차원을 이야기 하지.” 구상은 프랑스가 선정한 세계 200대 문인 속에 손꼽히는 원로 시인으로서 시골인 칠곡 지역에서는 과분한 큰 시인이다.

한 알의 모래에서 세계를 바라보며, 죽음에서 영원을 내다보는 뿌리 깊은 큰 나무이다. 구상에 관한 일화들이 많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구상 시인의 오랜 술친구였다. 구상 시인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혁명을 지지했을 뿐만 아니라 거사 전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박정희를 한 달간 은신시켜 줌으로써 만약 거사가 실패할 경우 국가 사범으로 처리될 각오와 책임을 함께 짊어졌다. 얼마나 위험천만한 모험이었던가? 왜 그처럼 엄청난 모험을 했을까? 우리는 이런 모험의 원인을 알기 위해 6·25전쟁의 피란지 대구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본다. 육군 지휘부가 대구로 집결해 있던 때가 있었다. 그 시기에 국방부 신문인 승리일보 주간이며 종군 작가 단을 이끌던 구상은 육군본부의 작전교육국 작전차장이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과 자주 어울려 술을 마셨고 두 사람은 전쟁의 폐허와 지독한 가난과 참상을 이야기하며 우국(憂國)의 마음으로 의기투합되었다.

구상은 5·16을 ‘구국의 혁명’이라 정의했고 남들이 침묵할 때도 주저 없이 5·16을 정의했다. 구상 시인의 고명 딸 작가 구자명은 “아버지께서 인간 박정희를 좋아하셨지 그 시대 정치를 좋아하지는 않았습니다”라고 말한다. 구상박정희는 인간적으로 가까웠지만 정치적으로는 먼발치에 있었다. 시인이 국방부 기관지의 주간으로 근무할 당시 청년 장교였던 박정희와 처음 인연을 맺었으며 오랫동안 교류했다.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시인에게 장관과 대학 총장직을 여러 번 제안했으나 “나는 수염 기르는 야인(野人)"이라며 거절했다. 1974년 2월 일본의 문학 행사에 참가했던 문인들이 그곳의 재일동포 잡지 발행인과 함께 식사를 했다가 졸지에 간첩으로 몰리는 황당한 사건이 있었다. ‘문인간첩단’ 사건이다. 법정에서 그들의 무죄를 말해 줄 용기 있고 유력한 증인이 나오길 간절히 기다렸지만 누구도 거기에 구상이 나오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런데 바로 구상 시인이 나선 것이다. 구상이 증언대에 서는 것을 보는 후배 문인들이 놀랍고 뜨거운 감격에 휩싸였다.

구상은 당당히 그리고 차분히 그들의 죄 없음을 증언함으로써 그들에게 고통을 안겨 준 당국을 꾸짖었다. 그 때의 구상을 가리켜 ‘구도자의 미학을 실현한 시인’이라고 했다. 그러나 구상이 구도자로 받드는 시인이 따로 있었으니 바로 공초 오상순이다. 공초가 마지막 꽁초를 놓고 눈 감았을 때 구상이 친구 박정희에게 말해서 수유리 빨래 골에 묏자리 1백 평을 마련했다. 구상은 조용하고 용기가 있었지만 정(情)에 약하였다. 6·25전쟁 직후 칠곡 지역에 살면서 허무와 절망의 피란지에 모인 문화 예술인들을 만나 밥을 사주고 술을 사 주며 아픔을 함께 하였다. 구상이 왜관에 거주할 때는 신문사의 어엿한 월급쟁이에다가 부인은 순심의원을 개업하고 있어 그럭저럭 살아갈 밑천이 되는 때였다. 1998년 세상을 떠난 중광 스님의 집에서 꽃을 보내왔다기에, 친구들의 부재(不在)가 적적하지 않은지 물었다. 기인(奇人)들과 친분이 깊었던 구상은 천재 화가 이중섭, 시인 공초 오상순, 아동문학가 마해송, 걸레스님 중광 등과 특별한 관계를 맺었었는데 그의 대답은 걸출이었다. “심심하지. 이 사회에는 모두 규격품만 있으니까 재미가 없어. 이 기인 일사(奇人 逸士)들은 재미없는 사회에 청량감을 주곤 했지 이들이 나서서 다니고 해야 ‘살수차’가 서는데 ..”라고 했다.

인간으로서의 구상은 그 인품이 인자하고 인맥은 상당히 넓은 것으로 유명하다. 문단이나 예술계는 물론이거니와 정치·경제계에도 많은 인사들과의 교분이 있었다. 그 중에 화가 이중섭과의 우정이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다. 이중섭구상 시인이 등단한 동인시집 「응향」에 표지 그림을 그린 화가이다. 왜관의 관수재구상과 함께 기거했던 이중섭은 일본에 있는 자신의 가족을 그리워하며 단란한 구상 시인의 가족을 이따금씩 그렸다고 하는데 한번은 병색이 짙은 구상 시인에게 천도복숭아를 그린 그림을 주며 쾌유를 기원했다고 한다. 구상 시인은 그 복숭아 그림 덕분인지 지병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연명할 수 있었다고 회상하였다. 이중섭이 그려준 가족화(家族畵)는 1970년대 말 그림을 1억 원에 판매해서 왜관의 성베네딕도 사제양성기금으로 내놓았다. 이중섭이 “너무 비참하게 살다가 가엾게도 너무 빨리 세상을 떠났다”고 구상은 한 언론 인터뷰에서 말했다. 구상은 그를 먹이고 재우고 여인의 분 냄새가 풍기는 풍류도 안겨 주면서 알뜰히 보살폈다. 구상이 아니면 더 일찍 가 버렸을 이중섭이었다. 구상이중섭이 남겨 준 그림 한 점을 호암아트홀에 팔았다. 삼성 측 관계자와 중개인이 구상의 거처인 여의도 시범아파트에 가서 거래 절차를 끝내고 돈을 내놓았다. 구상은 그 자리에 동석한 제3자에게 금액을 확인토록 한 다음 이렇게 말했다. “가지고 가서 잘 운영해 봐요“ 구상이 손도 대지 않은 엄청난 거금을 받아든 제3자는 칠곡 지역에 있는 양로원 관계자였으며 양로원의 후원자였던 것이다.

구상의 신앙은 가톨릭이다.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10·26사태로 세상을 떠나게 되자 망자를 위해서 5년 동안 제례 미사를 올렸다. 그에게 박정희6·25전쟁으로 초토화 된 땅에서 만났던 술친구였다. 박정희를 그냥 ‘박첨지’라고 불렀다. 구상의 시(詩)가 그러하듯이 그의 말은 기교나 겉 치례나 꾸밈이 없다. 순직하고 간명하여 흐르는 강물처럼 우정을 나누었고 친구 박정희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구상박정희를 두고 “내가 인간을 아는데 굳이 그가 깨끗하다고 말할 필요가 있을까? 의리 있는 남자라고 강조할 필요가 있을까? 도둑질 안할 사람이라고 말할 필요가 있을까?”라고 말했다. 그의 인품 속에 공사(公私)가 분명한 것처럼 구상의 문학은 곧 인품 그 자체였다. 인간에 대한 지극한 연민, 사랑이 많았고 장애인이나 빈곤층의 사람들, 소외층에 대한 사랑이 컸다. 1990년 장애인문인협회 창립 때부터 운영을 도왔으며, 장애인 봉사단체 ‘한벗회’ 후원자로도 활약했다. 폐질환으로 시인이 투병 생활을 할 때도 장애인 문학지 ‘솟대문학’에 2억 원을 쾌척하기도 했는데, 구상 시인은 이 기부사실 마저 절대 밖에 알리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고 한다. 그는 1980년과 1990년대에 교도소 수감자를 대상으로 문학·종교 강사로도 나섰다. 1990년대 중반에는 무기수 모씨를 양아들로 삼아 석방운동을 벌이기까지 했다.

그는 문화계에서 마당발이었다고 한다. 시인 김광균, 박용주 조각가 차호근 등 당대 예인들과 교류가 빈번했다. 시인은 강(江)과 시(詩)를 애인처럼 옆에 끼고 살았다. 그는 왜관의 낙동강의 문학적 정서와 그의 영원한 믿음의 고향인 왜관수도원에서의 종교적인 진리를 가슴에 품었으니 어찌 진정한 구도자가 되지 않을 수 있었으랴. 1995년부터 2004년까지 그는 한국문인협회 칠곡지부 고문으로 있으면서 ‘칠곡문학’이 창립되어 성장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따금 칠곡문학 창립회원들과 친목도 도모하며 좋은 교훈을 주고 담소를 나누었다. 그는 왜관 가톨릭 재단의 순심중고등학교 교가 가사를 지은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구상 문학관의 개관]

2002년 10월 4일 오전 일찍부터 칠곡군 왜관읍 왜관리 관수재칠곡군청 공무원들과 구상 문학관 건립을 추진했던 관계자들로 분주했고 왜관리 마을 주민들까지 마음이 들뜬 분위기였다. 이 날은 관수재를 복원하고 구상 문학관을 개관하는 날이었다. 프랑스가 선정한 세계 200대 문인이며, 현대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구상 시인은 1953년부터 1974년까지 20여년을 이곳 왜관에서 왕성한 문학 활동을 하였기에 그 차원 높은 문학적 삶을 높이 평가하며 기리는 마음과 구도자적 정신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칠곡 군민들의 정성과 긍지를 모아 문학과 문화의 토대를 굳건히 다지자는 것이 문학관 건립의 기본 취지였기에 그 열망은 대단했다. 그러나 이 날 인자하고 따뜻한 구상 시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구상 문학관 개관 일은 우리나라 계절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청명한 가을이었지만 구상 시인의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 서울 여의도 자택에서 요양 중에 있었던 것이다. 문학관을 개관하기 전에 구상 시인은 소장하고 있던 책 2만 2천여 권과 소장품 200여점을 왜관으로 보냈으며 그의 서울 한강 집 거실에는 개관 축하 화분 및 꽃바구니 몇 개가 한 켠에 놓여 있었다. “전봉건이랑 중광네에서 문학관을 연다고 꽃을 보내왔지 뭐야. 허허. 정작 나는 몸이 너무 안 좋아서 가보지도 못하는데.. 사실 문학관을 짓겠다고 말했을 때 몇 번이나 거절했는지 몰라. 주변 사람들에게 늘 얘기 하는 것 하나가 죽더라도 내 이름 딴 문학상 같은 거 만들지 말라고 하지. 살아서도 명리 추구하지 않았는데...”

개관식 날 기념식 개최 시간이 되자 많은 문학인들을 비롯하여 이의근 경상북도지사와 배상도 칠곡군수, 장영철 노사정 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된 뜻 깊은 이 행사에 구상 시인은 와병 [臥病]으로 인해 참석치 못하고 사위 김의규가 인사말을 대신 읽었는데 그 내용 속에는 구상 문학관 건립에 따른 구상 시인의 진솔한 심정과 구상 문학관 사용에 대한 미래의 바람이 담겨있음을 알 수 있다.

“오늘 저의 생애에서 가장 영예롭고 은혜스러운 자리에 제가 앞장서 참석하여 감사도 드리고 진심의 회포도 표명하는 것이 당연한 도리이온데 이렇듯 노병(老病)으로 상상만 떠올리고 있는 것이 유감스럽긴 하오나, 한편 돌이켜 생각하오면 그러한 생광(生光)을 누리려는 것이 도리어 과욕으로서, 오늘의 이 신령한 섭리가 저에게 가장 합당한 상태라고 여겨지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 한국에도 이제는 꽤 많은 고금의 문인들의 추모비나 기념관이 건립되고 있으나 그 모두가 사후에 이뤄지는 것이요 생존한 인사들의 문학비 등은 있어도 아직까지 문학관은 자력적인 것이 몇 개 있으나 이번 저의 문학관처럼 완전히 타력에 의해 건립되는 것은 문학사상 최초의 것이 아닌가 하옵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건립지 자체마저도 칠곡군이 시가로 사들였으며, 오늘날까지 그 건축 현장에 저는 한 번도 가 본적이 없는 정도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런 이야기를 왜 꺼내는고 하니 제가 이 고장에 20년이나 거주하면서 연작시 「밭일기」, 「그리스도 폴의 강」 등 작품을 쓰기는 했지만 이 본적지가 된 향토에 공사간 추호도 기여·공헌한 바가 없고 또한 저의 문학작품이라는 것도 다 아시다시피 오늘날 우리 문단을 비롯해 일반 독자들에게도 애독·애송 된다기 보다는 시쳇말로 "뭐 별로"요 오직 80평생을 쓴다는 그 하나로 소위 원로시인의 대접을 받고 있는 게 실상입니다.그래서 도야지 꼬리만한 그 허명(虛名) 자체가 이 문학관 건립의 연유가 되고 있다 하겠는데, 제가 이러한 사실을 최초부터 인지하고 파악하고 있으며, 사양하기도 하고 주저하기도 하고 내심으로는 문학관 명에서 "구상"을 제거하고 "칠곡" 이라고 제시하고 싶었으나 그것이 오히려 위선적 허세가 될까봐 자제하고 있었던 바입니다. 그런지라 이 자리에서의 저의 공언을 받아들이시어 가령 제가 살아서나 죽어서나 수용해 주시기 바라오며 또한 군민 여러분들은 오늘부터 실제적으로 그렇듯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쩌면, 이런 자리에 이렇듯 자기 술회만을 하여 무례가 될지 모르오나 저의 진솔한 심회이오니 양해하여 주시기를 바라며 이것으로 인사말을 갈음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이 초청장을 저로서는 부디 오시라는 것이기보다는 그저 폐인이 다된 저에게 이런 경사가 있다는 소식을 오직 알리는 것 뿐이옵니다.”

구상 문학관은 2000년 칠곡군이 구상의 옛 집터와 집을 구상 시인으로부터 사들여 군 예산과 국고보조금으로 건축하였으며 현재 칠곡군청에서 관리하고 있다. 구상 시인의 왜관 시절을 기억할 수 있도록 시인이 작품을 쓰던 관수재와 대나무 숲은 그대로 남겨두고 문학관만 건축가 김석철의 설계를 바탕으로 현대식 스틸 하우스(Steel House)공법을 통해 지어졌다. 문학관 1층에는 낙동강이 흐르는 모형을 재현하기 위한 수로관을 만들어 맑은 강물의 일부를 체험할 수 있게 하였다.

[문학인들의 사랑방이 된 구상 문학관]

구상 문학관 앞에 서면 제일 먼저 이 자리에 있었던 옛 ‘순심의원’이란 추억의 간판이 떠오른다. 구상 시인은 2004년 5월 11일 별세하였는데 그의 종교적인 생애를 애도하며 “수사의 복장으로 입관케하라”는 김수환 추기경의 말씀으로 그의 죽음이 완성된 것을 보았노라고 시인이며 방송인으로 있던 유자효의 「구상 추모 글」에 쓰여져 있다. 구상은 생전에 불운과 실패와 좌절 속에서도 의사였던 아내의 헌신적 부조로 지탱하였던 자신의 문학 생활을 뒤돌아보며, 문학관의 관수재를 증축하여 예술가 정양소로 지어 볼 꿈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어엿이 칠곡의 문학과 문화의 자존심이 된 구상 문학관은 지역 문학인과 예술인의 사랑방이 되었다.

구상 문학관 문학창작교실에는 연중 저명문학인 강사의 문학 강의가 끊이지 않고 있으며 문학단체들의 활약이 한창이다. 칠곡문인협회는 2004년과 2005년에 이곳에서 ‘구상예술제’ 를 개최하여 국내외 문인들을 초청한 바 있었고 2006년부터 칠곡문인협회에서 구상 문학관 개관 기념일에 구상문학제를 개최하고 있다. 또한 윤장근 선생을 대표로, 하오명, 공재성, 장호병 선생과 박상희 시인 등 언론인, 공무원, 문인들로 구성된 ‘그리스도폴의 강’ 모임에서는 2008년 10월 28일에 칠곡군수 및 기관장들과 국내외 문학인들을 초청한 가운데 구상 문학관에서 구상 시인의 시비(詩碑) 제막식을 가졌다. 이 자리엔 미나미 구니카즈 미야자키현시인협회장 및 일본의 문학인 다수가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주었다. 시비 제막식 준비위원장인 윤장근 선생은 이 날 대구 경북대병원에서 입원 중 수술을 앞둔 중환자임에도 이 행사에 참석하여 모든 사람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이 날 세워진 시비의 내용은 ‘그리스도 폴의 강’이다.

“오늘 마주하는 이 강은/어제의 그 강이 아니다./내일 맞이할 강은 오늘의 이 강이 아니다/우리는 날마다 새 강과/새 사람을 만나면서/옛 강과 옛 사람을/만나는 착각을 한다.”(강24)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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