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12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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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甲午更張 |
영어음역 | Gabo Gyeongjang |
영어의미역 | Reforms of the Gabo Year |
이칭/별칭 | 갑오개혁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양수 |
[정의]
조선 말기 청일전쟁 후 1894년 7월에서 1896년 2월까지 3차에 걸쳐 추진된 일련의 개혁운동.
[개설]
갑오경장(1894~1895) 이후 대한제국의 국권상실까지 약 15년간은 서울과 지방의 전 지역이 거대한 변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청주지역도 급격한 변화가 진행되었다. 청주도 1895년에서 1896년 사이에 공주부에 편제되었다가 충청북도로 개편되었다.
[역사적 관련사항]
갑오경장 추진 배경의 하나는 조선의 개화파 인사들과 동학농민층의 개혁 의지이다. 동학농민군의 폐정개혁(弊政改革)요구와 전주성의 점거는 갑오경장이 추진될 수 있었던 직접적 유인이었다. 다른 하나는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래 일관되었던 일본의 조선 지배 목표였다.
[갑오경장의 내용]
대체로 1894년 7월 27일에서 1896년 2월 초순까지 3차례 개혁이 있었다. 1차 개혁은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를 통해 208건의 개혁안을 의결하였다. 제3차 개혁은 제3차 김홍집내각이 성립된 때로부터 다음해 아관파천(俄館播遷) 직전까지 진행되었다. 이때 개혁으로는 태양력의 채용, 단발령, 군제개혁 등이 핵심이었다.
[의의와 평가]
갑오경장은 조선시대의 다양한 개혁의 흐름의 반영이지만, 일본의 구상과 압력이 작용하였고, 추진방법도 졸속이었다. 국방을 위해 절실하였던 군사제도면의 개혁이 취약하였다.
[갑오경장과 청주의 변화]
갑오경장이 추진되면서 조선의 전국 8도는 23부(府) 337군(郡)으로 개편되었다. 그에 따라 충청도가 충주부, 공주부, 홍주부로 개편되었다. 1870년(고종 7) 서원현에서 청주목으로 복귀되었던 청주는 이때 청주군으로 개칭되면서 공주부에 소속되었다. 그러나 아관파천이후 전국 23부제는 폐지되고 13도제로 변경되었는데, 이것은 갑오경장 이전의 전국 8도제에 준한 것이었다. 이 시기에 청주는 공주부에서 빠져나와 충주와 함께 충청북도 산하의 1등 군수 관할 지역으로 편제되었다.
그러나 충주에 있던 관찰부가 경상북도 문경의 문경새재 방면에 의병의 활동이 활발하였기 때문에 1908년 청주로 옮겨오고, 관찰사가 부임하게 되었다. 1907년 10월 충청북도경무서 산하에 보은 등을 관할하게 되었다. 다시 1907년 경무서가 경찰서로 개칭되면서 이후 1908년 청주, 충주, 제천, 영동 등 4개 지역에 경찰서가 설치되고, 청주에 처음으로 경찰서가 자리 잡게 되었다. 박영효 등이 주도하여 개편된 갑오경장 당시의 지방행정조직은 오늘날의 근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