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14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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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世祖-淸州行次 |
영어음역 | Sejoui Cheongju Haengcha |
영어의미역 | King Sejo's Official Tour to Cheongju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신영우 |
[정의]
조선왕조 제7대 임금 세조(世祖)가 1464년 온양온천의 행궁으로 가는 도중에 청주목에 머무른 사건.
[개설]
조선왕조 제7대 임금 세조가 즉위 10년(1464) 봄에 종기를 치료하고자 온양온천의 행궁으로 가는 도중에 청주목의 초수리(椒水里)[현 충청북도 청원군 내수읍 초정리]와 청주목에 6일간 머무른 사건이다.
[역사적 배경]
1464년 2월 21일부터 2월 26일까지 6일간 행해진 세조의 청주 행차는 그 본래 목적이 온양온천의 행궁으로 요양을 가기 위한 중간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그 배경이나 목적과 관련해서는 여러 가지 측면을 고려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즉, 온양으로 가는 직선로인 수원~천안의 노선을 대신하여 굳이 청주~보은을 거쳐 온양으로 간 데에는 어떤 정치적 배려가 개재되었으리라고 추정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우선 청주목이 세조 정권의 최측근 공신인 한명회(韓明澮), 한확(韓確) 등의 본향이라는 점이 고려될 수 있겠는데, 관련 사적이 보은지역을 중심으로 전승되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아무래도 법주사 복천암에 머물고 있던 승려 신미(信眉)와의 관계에 무게를 두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초수 행차는 치료의 목적보다는 그 부왕인 세종(世宗)의 초수 행차시에 자신이 궁궐을 수비했던 사실을 기념하고자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발단]
세조의 청주 행차는 1464년 2월 18일에 온양온천으로 행행(行幸)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세조는 본래 문무를 두루 갖춘 인물이었으나 즉위 8년 말부터 병을 앓기 시작하여 손수 『의약론』을 짓기도 했다. 그리고 즉위 10년에는 그도 종기를 치료하기 위하여 온양온천으로 요양을 떠나게 되었다.
다만, 이때의 행행은 단지 병을 치료하기 위한 요양의 목적만이 아니라 순행(巡幸)의 의미를 함께 갖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행차 도중에 충청북도 진천군 길상산에서 충청도 군사 4만명을 동원하여 사냥을 한다든지, 시위 군사로 경상도 병력을 동원하였다는 점 등에서 요양과 순행을 겸한 행차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경과]
세조의 어가는 2월 21일 밤에 먼저 초수(椒水)에 이르러 다음날 하루를 머물렀다. 진천을 거쳐온 국왕의 행차가 청주에 이르자면 오창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직선로임에도 불구하고 초수로 돌아온 것은, 채 하루를 머물지 않았다는 점에서 부왕 세종의 초수 행차 내지는 그 행차시 자신이 궁궐을 수비했던 사실을 기념하기 위한 거둥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청주목사 고태필(高台弼)과 판관 곽득하(郭得夏)가 영접하였다.
세조의 어가는 2월 23일에는 청주에 도착하여 노인, 유생, 창기 등의 영접을 받는다. 이에 대해 세조는 양로연(養老宴)을 베풀어 청주지역의 민심을 위무하였다. 그리고 26일에는 청주를 출발하여 회인현에 머물렀다. 양로연에서 세조는 노인들에게 술과 고기를 하사하였는데, 마침 104세인데도 기력이 건장한 노인에게는 특별히 의복도 하사하였다.
[의의와 평가]
세조의 청주목 행차는 온양온천으로 가기 위한 중간 노정상의 방문이었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써 큰 의미를 갖는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그가 온양으로 가는 직선로인 천안로를 택하지 않고 굳이 청주 및 보은을 거쳐 행차하였다는 점에서 정난공신인 한명회, 한확의 본향으로서 청주가 갖고 있던 세조 정권에서의 위상을 확인해볼 수 있는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