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3002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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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驛院 |
영어의미역 | Station Guesthous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칠곡군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김찬영 |
[정의]
경상북도 칠곡군에서 삼국시대부터 도로를 따라 발달한 마필 공급 및 숙식을 제공하는 장소.
[개설]
영남대로를 따라 발달한 칠곡 지역에 산재하던 역원(驛院)을 말한다. 부산에서 한양으로 향하는 영남대로의 길목에 위치한 칠곡은 일찍이 많은 역과 원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역촌에 대한 현황에서 칠곡의 고평역에는 77가구가 거주하며 김씨(34%)와 이씨(23%) 그리고 기타 성씨(43%)들이 분포하였다 한다.
[역원의 변천]
역은 지방 통치를 위한 공문서 전달, 관물·세공의 수송 및 관원 사행에 대한 마필의 공급과 숙식 제공, 변방 군정의 보고를 담당했고, 원은 관민 여행자의 숙식 제공과 빈객을 접대하던 기능을 갖고 있다. 우리나라에 우역제가 실시된 것은 대략 5세기 말로 추정되는데, 이 제도의 실시와 더불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우역이 설치되면서 공무 여행을 하는 관리들에게 마필과 인원을 공급해주는 역과 숙식을 제공하는 참 또는 원이 설치되었다. 이때 참과 원은 역의 보조기관의 역할을 하였다. 특히 이곳에서 음식을 취하고 휴식과 숙박을 함으로써 각 지역의 정보 교환 및 문화 전파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삼국시대 역사(驛舍), 객관(客館) 등은 단순히 물자의 이동뿐만 아니라 왕의 순시, 행차, 연회, 숙박 및 신하들의 왕래 및 배웅 등에 활발하게 이용되었다.
역참 제도가 도입되면서 역과 원이 함께 등장하지는 않으며 그 시기에 차이가 있다. 역에 비하여 원은 등장 시기가 늦는데 문헌적으로 7세기 초 경주의 남쪽 6리 지점에 대로원(大櫓院)이 전해진다. 대로원에는 명필 김생이 쓴 현판이 걸려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역이 관에서 설립된 것이라면 원은 사설 기관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조선 전기 각 군현에 약 1,300개의 원이 분포하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역과 함께 번성하던 원은 16~17세기를 넘어오면서 극히 일부만이 남고 모두 기능이 쇠퇴·소멸되고 주막이 원의 기능을 대신하게 된다. 원의 쇠퇴는 당시 원의 국유화와 임진왜란 이후 원이 폐쇄되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1,300개에 육박하던 원은 16세기를 넘어오면서 영남대로의 17개 군현에 165개의 원으로 그 수가 줄어들었으며 16세기 중엽부터는 그 수가 격감하기 시작하여 17세기 말 32개에서 18세기 말에는 20여개로 격감한다.
[역원의 건축 형태]
건축적 특성은 관아 건축 나아가 궁궐 건축과 양식이 대동소이했을 것이라 추정된다. 고려시대 교통 건축의 현존 유구는 없고 자료도 거의 없어 문헌과 역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추정할 수밖에 없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에 비해 보다 다양하게 발전하였다. 역(驛)과 참(站), 진(津), 도(渡)가 교통을 지원하는 행정기관이었고, 관(館)과 원(院)은 주로 숙박, 주점과 주막은 음식을 제공했다. 따라서 역사와 참역, 진사, 도사, 객사 등은 관 중심의 교통 건축인 반면, 원은 반관(半官) 반민(半民)의 성격을 지니고 주점과 주막은 민간 중심의 교통 건축이었다. 이런 성격은 건축적 특성으로 그대로 나타나 관 중심의 교통 건축은 관아적 특성을 보였다. 그러나 임진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역사·객관·원우는 대개 파괴되어 복구되지 못했고, 일부는 주막으로 대체되기도 했다.
[칠곡의 역원 현황]
1530년(중종 25)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칠곡에는 양원역을 비롯하여 동안역이 있으며, 이외 고평역, 수향역, 영청역, 상림역 등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수향역은 석전에 위치하며 『고려사(高麗史)』에 기록이 전해지나 1396년 당시 조사에는 역관 터만 전해졌다. 상림역은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해 선산 장내에 위치하게 되었다. 영남대로의 길목에 위치한 칠곡에는 일찍이 많은 원이 분포하였는데, 원이 번성한 16세기 전까지 칠곡에는 약 10여개의 원이 위치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칠곡에 원이 번성하였던 것은 한양으로 향하는 영남대로의 길목 중 대구를 지나 현재의 다부동 근처인 소야현 그리고 선산으로 넘어가는 길이 험하여 도적의 출몰이 잦고 도로의 훼손이 심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기록에 알려진 칠곡의 역원은 숭유원, 유원, 작원, 매원, 종자원, 소야원, 초원, 광혜원, 적석원 등이 있다. 이들 대부분은 기록에만 전해지며 흔적은 현재로서는 찾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