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300626 |
---|---|
한자 | 張悌元 |
영어음역 | Jang Jewon |
이칭/별칭 | 중순(仲順),심곡(深谷)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학하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박헌규 |
성격 | 유생 |
---|---|
출신지 |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
성별 | 남 |
생년 | 1556년 |
몰년 | 1621년 |
본관 | 인동 |
[정의]
조선 중기 칠곡 출신의 유생.
[가계]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중순(仲順), 호는 심곡(深谷). 고려 초 삼중대광신호위상장군(三重大匡神虎衛上將軍)을 지낸 장금용(張金用)을 시조로 하는 인동장씨이다. 학거(學渠) 장순(張峋)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성산이씨, 부인은 전의이씨이다.
[활동사항]
1591년(선조 24)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일찍이 한강 정구(鄭逑)와 여헌 장현광(張顯光) 문하에서 성리학을 얻어 들어 깊은 견해가 표창할 만했다. 문강공(文康公)이 시(詩)를 주어 말하기를 “이미 내 마음은 한결같이 그대 에게 있네. 차라리 이 몸을 저 곳에 나누어 두어. 그대가 미혹하면 내가 혹 깨우치고 내가 어두우면 그대가 혹 열어줄 것이다.”라고 했다. 임진왜란 때 인동정제장(仁同整薺將)으로 천거되어 의병을 일으켜 난민을 구제하고 많은 공적을 남겼다. 체찰사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에게 일찍이 고을의 교수와 향사로 추천을 받았으나 취하지 않았다. 부지암(不知巖)에 정사(精舍)를 세워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이 은거하며 학업을 닦는 곳으로 삼았다.
[묘소]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봉림원(鳳林院)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