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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한국으로 들어오기까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3A030101
분야 지리
지역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매원리
시대 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이순하

매원리를 찾은 11월의 어느 날, 마을을 지키기 위해 사람들이 마을 입구에 천막을 친 채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던 곳에서 박화자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단아한 모습에 입을 가려 웃으시는 모습마저 꼭 소녀 같은 박화자 할머니는 1931년 일본 동경에서 태어났다. 한국이 워낙 가난했던 시절, 할머니의 부모님은 일본으로 이민을 선택하셨고 그곳에서 박화자 할머니를 낳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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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원리 노인회관 인터뷰-서호댁 할머니

일본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고 8·15 해방을 맞은 할머니는 1946년 3월 13일 한국으로 귀국하게 된다. 그녀가 한국으로의 귀국을 선택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외로움이었다고 한다. 당시 할머니네 가족과 함께 일본에서 이민생활을 했던 이웃은 다섯 가구였다. 타지에서의 외로움이 컸던지라 다섯 가구는 한 가족처럼 지냈는데, 해방이 되자 할머니의 가족과 한 가족을 제외한 나머지 가족들이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자 할머니의 가족도 귀국을 결심하게 된 것이다.

당시 조선의 가난이 두려웠던 할머니의 부모님은 귀국을 반대하였으나, 할머니는 본인이 생계를 책임질 수 있을 것이라면서 부모님께 귀국할 것을 설득하였다. 당시 일본에서 명문여고에 다니고 있던 터라, 한국에서도 학교만 졸업하면 취업이 가능할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당시, 한 가족같이 지내던 이웃 중 평양이 고향인 사람이 할머니 가족에게 북한으로 가자고 권유를 했다. 단 한 번도 한국에 와 본 적이 없던 할머니는 그때 처음 조선이라고 부르던 대한민국의 지도를 펼쳐봤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이북이라고 불렀던 북한은 산맥이 많고, 부모님의 고향이었던 남한은 평야가 많음을 알게 되었다. 이 때문에 할머니는 부모님께 평양이 고향인 그 이웃을 따라 귀국하는 것을 반대했다고 한다.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학교를 다녀오던 날은 한국으로의 귀국 신청을 받는 마지막 날이었다고 한다. 등굣길 곰곰이 고민을 하던 할머니는 결국 귀국신청을 하게 되고, 어렵게 부모님을 설득해 처음 한국 땅을 밟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행은 그다지 순탄치만은 않았다. 일본에서 그 당시 논 50마지기를 살 정도의 돈을 모아 통장에 넣어 가지고 왔으나 대일청구권이라는 제약 때문에 한국 돈으로 바꿀 수가 없었던 것이다.

1946년 3월 13일 부산항에 도착한 할머니의 가족은 미국인을 통해 종이로 된 표 석 장을 받게 된다. 표 한 장 당 1천 원으로 교환할 수 있는 종이였다. 당시 부산항에서 칠곡군 약목면으로 오는 택시비가 5천 원이었다. 2천 원이 더 필요했던 할머니는 표를 잃어버렸다고 거짓말을 하고, 낯선 이를 따라가 표를 받게 된다. 그녀는 “혼자 왔냐?”고 묻는 낯선 이에게 짐을 들어주는 사람과 함께 왔다고 거짓말을 해서 표 두 장을 받아 2천 원을 더 구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할머니네 가족은 경상북도 칠곡군 약목면에 새로운 터전을 꾸리게 되었고, 할머니는 약목면에서 1년을 살다 매원리로 시집을 오게 된다.

[정보제공]

  • •  박화자(여, 1931년생, 매원리 거주, 부녀노인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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