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3B0102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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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지리 |
지역 |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순하 |
예전에는 시골 길거리에서 술과 밥을 팔고 나그네에게 잠자리도 제공했던 곳을 주막집이라 불렀다. 우리나라에는 19세기 후반까지도 촌락의 10~20리 사이에는 1개소 이상의 주막이 있었다. 특히 장시(場市)가 열리는 곳이나 역(驛)이 있는 곳, 나루터와 광산촌 등에는 어김없이 주막집이 들어서 있었다. 다부역이 있던 다부리에도 주막집이 있었는데, 다부역이 사라지면서 주막 대신 양조장이 들어섰다고 한다.
다부리의 양조장은 주막에서 변화되었기 때문에 간장이나 식초 등은 만들지 않고 술만 팔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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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양조장) 자리
다부리에서 양조장을 운영했다는 할머니에 따르면, 다부리 양조장에서 팔던 술은 모두 천평에 있던 양조장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즉 천평의 양조장이 다부리 양조장의 본점과 같은 역할을 했던 것이다. 당시 할머니는 사람들이 원하면 배달도 해주었다고 전한다.
마을 사람들에게 양조장의 술은 행사가 있을 때마다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단골 메뉴였다. 굳이 행사가 없는 날에도 마을의 남정네들은 삼삼오오 모여 양조장 술을 받아 고단한 하루를 달래기도 했다. 술이 맛있었느냐는 물음에 마을 사람들은 “그때는 맛있어서 먹은 게 아니라 배가 고파서 먹은 게 더 컸다.”며 당시 가난했던 상황을 대변해 주었다. 요즘은 술이 나오면 당연지사 안주도 나오는 것이라고 알고 있지만, 1980년대까지 소금을 안주 삼아 먹었다고 한다.
1970년대 초까지 양조장을 운영했다는 여든셋 살의 할머니와, 그 할머니 밑에서 양조장일을 했다는, 벌써 육순을 훨씬 넘겨 버린 아들의 기억 속 양조장의 모습은 대부분 배달과 관련한 것들이었다.
“아들들이 말구루마 매가(고) 그거 싣고 금호강이고 원정이고 배달했지. 즈그가(손님들이) 와가(서) 가지고 가는 사람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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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부보건진료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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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조장을 운영했던 할머니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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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조장을 운영했던 할머니 인터뷰
한참 많이 팔릴 때는 하루에 백 말도 팔았다는 말도 있고, 경상북도 남동부에 위치한 금호강까지 배달을 갔다는 것으로 보아 다부리의 양조장 술맛은 과히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양조장 술 하나로 배도 채우고 시름도 달랬다는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당시 가난했지만 마음만은 풍요로웠을 그들의 모습이 눈 앞에 보이는 듯했다.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