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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동네 오부자집 이야기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3D010201
분야 지리
지역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신3·4리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이순하

1920년대 웃갓마을 서원촌 중앙 지점에는 새마(新村) 또는 오부자촌이라고 불린 마을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에게는 ‘새동네’라는 표현이 더 익숙한 이 마을은 약 20여 가구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새동네가 만들어진 것은 1926년 이재문이란 사람과 그의 형제들이 들어오면서부터라고 한다.

“한 집이 와가지고 큰 동네를 차린 거야. 한 집에서 자기들이 와서 아들도 살고 어른도 살고 그래 사니깐 담도 새로 만들고 큰 부자로 사니깐 또 심부름 시키는 사람들도 살고 그러니깐 동네를 차리게 된 거야.”

맨 처음 마을에 들어온 건 이재문이란 사람이었고, 그 후 이재문의 5형제가 가솔을 이끌고 모두 들어왔는데, 집안일을 도와주는 하인 등도 함께 들어와 살게 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곧이어 마을에 기독교 교회당이 들어서더니, 전도사에 교사, 식모, 침모 등도 따라 들어와서 새동네 가구 수가 20여 가구는 넘었다고 한다. 새동네에 들어섰던 교회당 때문에 새동네는 지천면 기독교 시발지로 알려져 있다

새동네의 집들은 하나같이 성곽과 같은 높은 담장을 쌓아 그 안에 5형제의 별장과 주택 그리고 기독교 교회당으로 구성되었고, 매우 풍요로운 생활을 누렸다고 한다. 당시 새동네 사람들은 이재문 형제의 땅을 밟지 않고서는 어디로도 갈 수 없을 만큼, 이재문 형제의 재산이 많았다고 전한다. 그러나 1931년 새동네는 이재문의 5형제가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되면서 사라졌다.

2009년 현재 새동네가 있던 자리는 대부분 농경지로 이용되며, 그 위로는 경부고속국도가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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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동네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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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동네터와 철길

일부 마을 사람들은 새동네 사람들이 일제강점기 민족성과 저항의식을 화폭에 담은 화가 이쾌대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전한다. 화가 이쾌대는 1913년 지천면 신리 39번지인 웃갓마을에서 이경옥과 윤정열의 2남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이쾌대는 3만석꾼이자 대한제국 시절 두루 군수를 지냈던 아버지 이경옥 아래에서 유복하게 자랐으며, 1921년 신동소학교를 마치고 대구 수창보통학교로 가면서 웃갓마을을 떠나게 된다.

그 후 서울 휘문고보에 입학한 이쾌대는 당시 담임이자 미술교사인 장발(張勃)[장면 전 국무총리의 동생으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학장 역임]로부터 미술지도를 받으면서 본격적인 미술학도로 접어들었다. 이쾌대는, 『조선복식고(朝鮮服飾考)』라는 책을 펴내 우리나라 복식사 연구에 큰 업적을 남긴 형 이여성(李如星)[본명 이명진]으로부터 미술뿐 아니라 정신적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이쾌대는 한국전쟁 당시 북으로 가서 작품이 빛을 보지 못하다가, 1988년 현대문화예술작품과 인물들이 해금(解禁)될 때 문화예술적 성과를 인정받아 근대화단의 역사를 다시 써야 할 만큼 이목을 집중시켰던 화가이다. 화가 이쾌대의 작품은 민족적인 소재와 사실적 기법뿐만 아니라 작품의 완성도도 뛰어나 근대미술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보제공]

  • •  권태호(남, 1921년생, 웃갓마을 거주, 웃갓마을 노인회 회장)
  • •  강재희(남, 1920년대 생, 웃갓마을 거주, 진주강씨박사공파문중 회장)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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