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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충식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301952
한자 蔡忠植
영어음역 Chae Chungsik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칠곡군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민족운동가
출신지 경상북도 달성군 공산면 미대동
성별
생년 1892년 11월 5일연표보기
몰년 1980년연표보기

[정의]

일제강점기 칠곡 등에서 활동한 민족운동가.

[개설]

1892년 11월 5일(음력)에 달성군 공산면 미대동에서 아버지 채성원(蔡星源)과 어머니 서남주(徐南珠)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나 한학을 수학한 후 대구농림학교에 다녔다. 3·1운동 이후 왜관에서 청년운동, 교육운동, 언론활동을 하였다.

[활동사항]

3·1운동 이후 왜관에서 사회활동에 참여하였다. 1923년 왜관청년회가 운영하던 여자야학의 교사로 활동하는 동시에 조선일보 왜관지국장을 활동하였다. 1925년에 낙동강 범람으로 큰 피해가 일어나자 칠곡기근구제회(漆谷饑饉救濟會)의 결성을 주도하였다. 1926년 칠곡, 선산, 성주 등 3개 군의 언론 기관과 삼군기우단(三郡記友團)을 결성하고 언론의 사회적 책임을 진작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같은 해 왜관청년회가 운영하던 동창학원(同昌學院)의 교사가 되어 농촌 아동에게 교육의 기회를 부여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같은 해 6월 순종황제 인산 때 백립(白笠: 흰 갓) 1천 8백 개를 구해 대중들에게 나누어주면서 순종의 죽음을 애도하고 민족의식을 전파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927년 1월 여운형, 최정익 등과 농촌 개발과 문맹 퇴치의 기치를 내걸고 조선농인사(朝鮮農人社) 결성에 앞장서고 이사로 활약하였다. 같은 해 신간회 칠곡지회 설립 준비위원으로 한 뒤 신간회 칠곡지회 의장 겸 서무부 총무 간사가 되었다. 1928년 1월 조선청년총동맹 경북연맹위원회를 결성하기 위해 개최되었던 경북기자대회에서 임시집행부 의장, 집행위원장 겸 서무부장을 맡았다. 그리고 경북기자대회 직후 열린 경북청년운동자간담회에 참가하고, 이 간담회를 통해 결성된 조선청년총동맹 경북연맹위원회에 관여하였다. 그 후 대구로 활동 무대를 옮겨 중외일보 대구지국 기자의 신분으로 민족운동을 펼쳤다.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으로 확대되던 1930년 3월 무렵 대구청년동맹 위원장 박명줄(朴明茁) 등과 함께 일제의 조선 지배 부당성을 알리고 대중들의 민족운동에의 동참을 호소는 활동을 하다 일경(日警)에 체포되기도 하였다. 그 무렵 신간회 대구지회에 들어가 서무부장 겸 서기장으로 활동하였고, 1931년 5월에는 신간회 본부의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신간회가 유지되도록 노력하였다.

일제 말기 경상북도 각 지역의 민족적 성향을 가진 언론인들과 함께 보도 협조망을 조직하여 동지 간의 연락과 정세 동향 및 운동 방향을 모색하였다. 일제 패망 직전 해방과 건국을 준비하기 위한 비밀결사로 건국동맹이 결성되자, 1945년 1월 대구의 김관제, 이선장, 정운해 등과 건국동맹 경북조직을 결성하였다. 해방되던 8월에 건국동맹 경북 지역 관계자들과 함께 검거되어 해방을 감옥에서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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